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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새긴 “조국 통일”...86세 노 목사의 꿈수표교교회, 시카고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43년만에 영구귀국한 차현회 원로목사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지 43년, 차현회(86) 목사는 왜 굳이 영구 귀국을 택했을까. 시카고연합감리교회를 맡아 미국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중 하나로 성장시켜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던 그가 말이다. 지난 11일 오전, 그의 자택 근처인 경기도 안양의 한 교회 커피숍에서 차 목사를 만났다.

   
▲ 차현회 목사. ⓒ유코리아뉴스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은 네 가지야. 그 중에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고 남은 생애 동안 꼭 이뤄야 할 일도 있지. 우선 4년에 한 번씩 열고 있는 세계한인선교사대회를 계속 잇는 일이고, 지역별 선교사 수련회, 선교사 자녀(MK) 장학재단을 잘 운영하는 일이지. 이 세 가지는 지금 잘하고 있어. 나머지 하나가 걸리는데 조국통일이야. 아직 사람을 접촉하고 있는데 컨택(접촉)이 쉽지 않아.”

1969년 4월, 그가 미국연합감리교회(UMC)의 요청으로 시카고연합감리교회 목회를 시작했을 때 교인은 차 목사 가족 5명을 포함해 30여명이 전부였다. 차 목사가 한 일은 거의 매일 교회에 나가 통곡하며 기도하는 거였다. 다행히 1972년 국내 이민법이 완화되면서는 한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나중엔 2000명까지 출석하는 미국 내 최대 한인 감리교회로 시카고연합감리교회가 우뚝 설 수 있었다. 이 공로로 차 목사는 1985년 UMC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미국 전역에서 시카고연합감리교회의 성장을 따라 배우는 계기가 됐다.

1983년 5월 즈음이었다. 5월 24일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회심 주일을 맞아 시카고연합감리교회에서는 웨슬리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던 차 목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너를 미국에 보낸 건 이 교회 하나 때문이 아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 당장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찾아갔다. 그레이엄 목사는 차 목사의 볼을 비비며 그렇게 반길 수가 없었다. “안그래도 우리 세계선교센터에 한국 데스크만 없었는데 잘 됐다. 내일이라도 당장 들어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게 세계한인선교사대회다. 지난해까지 일곱 번을 개최했다. 해마다 참석 인원이 늘어 지금은 7000명이 참석하는 세계적인 규모가 됐다. 선교사 1000명에, 딸린 가족 1000명, 이들의 동역자 5000명이 참석한다.

“내가 지금까지 미국에서 했던 일은 단 돈 1불(달러)도 없이 한 것들이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감히 상상을 할 수 없는 거야. 저 양반(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만 하면 나머지는 다 책임지신다는 걸 경험한 40년이었지.”

8회 세계한인선교사대회부터는 장소를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여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장소나 재정 등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경력도 화려하다. 미국으로 파송받아 가기 전 5년 동안 그는 종교감리교회에서 목회했었다. 1965년 그가 종교교회를 맡으면서 시작했던 게 오후 영어예배와 그에 따른 ‘1부 예배’ 도입이었다. 국내 교회로는 처음이었다. 영어예배를 도입하게 된 건 그가 계동교회 목회를 할 때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매 주일 오후마다 열리던 외국인 예배에 참석했던 게 계기가 됐다. 당시 태화관 외국인 예배는 2층 통로까지 비집고 앉아야 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그때 차 목사가 다짐한 게 ‘우리 교회에도 무조건 영어예배를 시작한다’는 거였다. 1965년 종교교회 부임과 함께 영어예배가 시작된 이유다. TV나 라디오 광고도 없던 시절, 청년들을 통해 연세대, 이화여대, YMCA 등에 전단을 돌린 게 전부였는데 첫날 오후 4시 영어예배에 401명이 참석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종교교회엔 당시 국무총리, 장관 출신들이 9명이나 나올 정도로 유명한 교회로 자리잡고 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내외도 한 달에 한번씩 종교교회를 어김없이 찾았다. 현직 교수들은 수십명에 달했다. 당시 차 목사의 나이 37세밖에 안됐을 때였다.

“워낙 내가 배짱이 좋아서 그런지 그런 분들 앞에서 전혀 주눅이 안들었지. 교인들한테는 좀 미안하지. 생각하면 전적으로 아버지의 후광이었던 것 같아. 아버지가 목회를 참 잘하셨거든. 아버지는 설교할 때마다 눈물 없는 날이 없었지.”

   
▲ 86세의 차윤회 목사의 꿈은 '조국 통일'이다. ⓒ유코리아뉴스 구윤성

차 목사의 부친 차경창 목사. 그는 일제 시대 독립투사였다. 18세 때 김포 월곶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서대문형무소 수인(囚人) 신세가 된다. 그때 전도지를 통해 복음을 접하고 출옥 후 피어슨신학교, 감리교신학교를 거쳐 22년간 강원도 영월에서 목회했다. 해방 후 서울 수표교교회에 부임해 교인들이 발디딜 틈이 없을 만큼 성장시키기도 했다는 게 아들 차 목사의 설명이다.

“아버지는 늘 나라를 위한 설교를 하셨어. 나라가 이래선 안되고, 백성들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무엇보다 눈물로 기도하고 눈물로 설교하는 분이셨어. 그러니 어느 누가 감동을 안받겠어. 교회는 늘 성도들로 차고 넘쳤어. 무엇보다 베풀고 나눠주는 분이셨지. 후배나 친구들이 찾아오면 당신이 가진 옷이나 물건을 다 나눠주셨어. 별명이 ‘단벌신사’셨어. 아들이지만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분이셨지.”

하지만 아버지 차 목사는 6.25 전쟁 때 행방불명이 됐다. 경위는 이렇다. 차 목사가 3.1운동 가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 ‘이승엽’이란 사람이 있었다. 형무소 동기였던 셈이다. 좌익에서 활동하던 그는 6.25 전쟁 발발과 함께 김일성에 의해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에 임명된다. 당연히 그는 감옥 동기인 ‘절친’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비서를 보냈다. 그 길로 따라나선 차 목사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승엽 위원장의 비서가 집에 왔을 때 마침 집에 있었던 아들 차현회 목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비서를 보고 아버지가 깜짝 놀라셨어. 그 비서 역시 형무소 출옥 30여년만에 아버지가 목사가 되고 수표교교회 담임목사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더라구. 서울시장이 됐으니 발판이 필요했을 테고 아버지는 고심 끝에 따라나가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

아버지가 끌려가서 죽었다는 걸 확신한 건 꿈을 통해서다. 어느날 새까만 승용차가 집앞에 멈췄는데 까만 옷에 까만 모자를 쓴 아버지가 내리셨다. 그런데 얼굴마저도 숯덩이처럼 까만 게 아닌가. 아버지는 등에 길따란 백을 매고 계셨다. 그러더니 그걸 차 목사 앞에 툭 던져놓고 뒤돌아서 가버리는 거였다. “같이 가요” 불렀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때부터 차 목사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고, 7명의 동생과 어머니를 돌보는 가장 신세가 됐다. 아버지는 결국 나중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원래 차 목사의 꿈은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20대 때 갑자기 가정을 떠안으면서 정치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였다. 중국에서 광복군을 이끌다가 귀국한 이범석 장군은 젊은 지도자들을 길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민족청년단을 조직했다. 차 목사도 해방 이듬해 수원에 있던 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학도반에 들어갔다. 대학생 대상 훈련반이었다. 그때 만난 동기가 중앙정보부장,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종필씨다. 그 인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과도 대면할 수 있었다.

   
▲ 43년만에 영구 귀국한 소회를 밝히고 있는 차현회 목사. ⓒ유코리아뉴스 구윤성

하지만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노골화되던 1970년대부터는 ‘독재 반대’를 외치며 미국에서 ‘반(反) 박정희’ 편에 섰다. 그 때문에 15년간 입국을 거부당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독재자의 딸 박근혜 당선인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일까.

“반반이야. 우선 사람이 없었잖아. 박근혜 비슷한 사람만 있었어도 찍었을 텐데 말야. 그렇다고 문재인을 찍기엔 너무 이념적으로 치우친 것 같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 뭐. 감사한 것은 박근혜가 15년간 훈련을 많이 받았어. 묵직한 데도 있고. 박근혜를 안 건 여학교 다닐 때부터였어. 육영수 여사가 배화여고 출신이고 종교교회 담임목사는 배화여고의 당연직 이사가 되는데 그때 육 여사를 만났고, 박근혜는 어릴 적부터 봐왔어. 무엇보다 박근혜는 경험도 많고 인생의 고비도 많이 넘겼어. 인간적으로 보기보다는 그 사람의 생활철학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 나이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나. 한편으로 보면 불쌍하다. 그만큼 결단하고 각오하고 나라를 위해 일한다니까 밀어줘야지.”

비상한 기억력에 활기 넘치는 건강, 86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다. 건강 비결이 궁금했다. “강원도 원주에 안영환 선생이라고 일제 때 원반 던지기 일본 국가대표도 하셨던 분이 계셨지. 이분이 가끔 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쭉 살피고 키나 스피드를 체크하시곤 했지. 그때 내가 발탁이 된 거지. 글쎄 나한테 ‘산단도(3단 뛰기)가 맞는 것 같다’고 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나중엔 대표가 돼서 16m 27cm를 뛰었는데 그게 지금도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하더라구. 그 덕분에 나는 공부도 안하고 돈도 없이 고려대에 합격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것도 1년만 다니고 결국 돈이 없어서 정인보 선생이 학장으로 계셨던 국학대학에 편입해 졸업했어. 하나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야. 나같이 돈 없는 사람을 운동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게 하시고 졸업까지 시켜주셨으니까 말이야.”

필생의 과업인 북한 선교를 어떻게 할지를 묻자 그는 “나이가 여든이 넘어가니까 이젠 죽음도 두렵지 않다”며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건 아버지가 못다 한 일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1월 숨진 북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 강영섭 위원장과의 인연을 설명했다. 차 목사에 따르면 강영섭 위원장의 아버지 강양욱 목사(김일성의 외삼촌)와 아버지 차경창 목사는 친구였다. 강영섭 위원장은 원래 판사였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 조그련을 맡기 위해 판사를 그만뒀다. 차 목사는 지금까지 강영섭 위원장을 5번이나 만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뉴욕에서만 두 번 만났다. 북한에서도 6번 초청했지만 한번도 가지 못했다. 김일성을 만난다는 전제조건을 내걸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조국 통일’ 넉 자는 그의 가슴에 더욱 절절해지고 있다.

“통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야. 인간의 역사가 아니야. 북한에 있는 하나님의 일꾼을 만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미국이나 한국에도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이 많지만 대부분 야심으로 하지 애국심으로 하지 않아. 자기 공로만 내세우려 하지. 눈물로 하고 기도로 해야지 야심을 가지고 하면 다툼, 분열밖에 안돼. 강영섭 위원장도 죽고 이젠 누구랑 얘기해야 하나, 그게 걱정이고 기도제목이야.”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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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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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철호 2013-01-17 22:20:37

    오늘 북한회복감리교연합 기도회에 오셔서 축도를 해주셨습니다.
    사모님도 너무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정말 탈북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감리교단을 깨우시는 일에 쓰임받을 줄로 굳게 믿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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