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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일어나면 앞이 보이지 않아요.”제2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어려서부터 국가에서 주는 배급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죽은 이후로 100일이었던 애도기간이 3년으로 연장되었고, 당에서는 ‘고난의 행군'을 선포했습니다. (1994년~1998년 사이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합니다. 김일성이 죽고, 배급제도는 있으나 실제로 공급은 되지 않아 300만 아사자가 생겨난 시기이지요. 풀도 없어 못 먹을 지경이었으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난의 행군을 ‘당’이 선포한 것은, 북한에서는 당이 가장 상위에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당에서 지시하는 대로 나라 전체가 움직이지요. 당의 중심은 수령체제입니다. 즉, 김씨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의 뜻을 배반하면 김씨를 배반하는 것과 같으므로 정치범수용소로 직행하게 됩니다.)


고난의 행군, 그리고 총살

고난의 행군 기간에 국가로부터의 배급이 끊어졌습니다. 늘 받던 배급이 끊어지자 많은 인텔리 분들은 고지식하게 굶어 죽었습니다. 풀뿌리를 뽑아 먹든, 나무껍질을 벗겨 먹든, 그렇지 않으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었던 사람들은 저처럼 살아서 숨 쉬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다 굶어 죽었습니다. 한 하모니카사택에 40명이 산다고 하면, 하루에 40명 전부가 굶어 죽을 정도였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도 간신히 죽을 먹고 학교에 갔습니다. 선생님들도 굶어서 못 나오는 분들이 대다수였고, 나오는 분들도 한 시간을 서서 말을 할 힘이 없어서 자습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학교의 출석률에 따라 선생님들도 평가를 받으니, 선생님은 저에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데려오도록 지시했습니다. 학생들의 명단을 가지고 이곳저곳 찾아가보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먹지 못해 누워 있는 아이들, 부모님 따라 풀을 뜯으러 산에 간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굶어 죽은 친구 김성교도 있었습니다. "학교 가자"라고 말 할 수 있는 상황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공부하는 데 집합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전교생이 모여 총살을 구경하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을 본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는데 앞에는 세 개의 말뚝이 서 있고 옆에는 방송차로 "민족반역자…" 라며 불어 대고 있었습니다. 소를 도적질해서 먹은 사람, 전동기선을 풀어서 중국에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 앞에 총을 멘 군대아저씨들이 나란히 서더니 " 반동분자 XX 향하여 쐇!", 그리고… 총에 맞아 아무 말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나 불쌍하고 안쓰러웠습니다. 학교에 돌아 온 후 선생님은 굶어 죽더라도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총살을 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집집마다 먹고 살기 어려워서 가정을 뒤로 한 채 식량구입에 나섰습니다. 그러다보니 자동차, 버스는 기름이 없어 다니지 않았고 기차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가다가도 섰습니다. 가끔 들어오는 기차를 타려면 화물차 방통에 타야 했고, 일반기차를 타려고 해도 기차 창문에 앉거나 기차 승강기 밑, 아니면 기차방통 위에 누워 가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전깃줄과 기차방통사이가 좁기 때문에 누워 있다가 앉으면 전기에 붙어 죽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차 안에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앉아서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손잡이만 잡고 기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매달려 가던 사람들은 기차가 도달할 때면 역전 기차 높이에 따라 기차 밑으로 말려 들어가 다리가 잘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객사한 사람들이 많았고, 부모를 찾아 떠난 자식도 많았습니다. 식량을 찾아 떠난 어머니들의 행방을 찾아 중국으로 넘어가는 아이들도 많았고 객지에서 꽃제비로 살아가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사람이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단순해지는 것 같아요. 삶의 의욕이 더 강해지는 한편, 동물처럼 먹는 것 하나에만 삶을 바치려는 의식이 강해집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 먹나요? 먹기 위해 사나요?" 라는 질문에 "살기 위해 먹지요"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는 철저히 “먹기 위해서 삽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고, 누구나 그 환경이라면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풀이라도 먹어야 산다!"
“팀! 풀 뜯으러 가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굶었기 때문에 피가 돌지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
“엄마 일어나면 앞이 보이지 않아요.”
어머니는 배낭을 메시고는 혼자 밖으로 나갔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배낭 가득히 딸기나무 순, 능제 등 먹을 수 있는 풀은 다 뜯어 오셨습니다. 동물들만 풀을 먹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우리도 원시사회로 돌아온 것만 같았습니다.

   
▲ “팀! 풀이라도 먹어야 산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엄마하고 같이 죽을까?”ⓒ이윤경(재능기부)

그러고도 한 참 후, "일어나라 엄마가 먹을 거 가져 왔다"는 소리에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가져온 것은 뜨거운 물에 데운 풀과 소금그릇이었습니다. 며칠을 굶었기 때문에 풀에 소금물을 찍어 먹어 보았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쓰디쓴 풀을 조금 먹다가 다시 뱉었습니다.
“팀! 풀이라도 먹어야 산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엄마하고 같이 죽을까?”
어머니는 풀을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다시금 꿀꺽 삼켜 보지만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등을 뒤로 한 채 누웠습니다. 이유 없이 눈물만 볼을 타고 흘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풀독으로 눈과 다리도 부어 있었습니다. 거울을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그렇게 다리도 두 번 부었다가 내렸어요. 북한에서는 세 번 부었다가 내리면 죽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젠 나도 죽는 구나' 라고 맥을 놓고 있을 때 외할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기숙사생활을 했습니다. 기숙사 밥의 양은 두 숟가락 정도 되었어요. 그래서 자주 저희 집에 찾아와 밥을 먹고 가셨었는데, 그날은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있는 저를 보고 할아버지가 오히려 식권을 주셨습니다.
“팀! 합숙 안에 있는 식당에 가서 이 식권 내면 밥을 준다. 밥을 타서 먹고 용기를 내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죽는다. 또 올게.”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던 저였지만 식권으로 밥을 먹으러 갈 때만큼은 날아서 가는 것 같았습니다. 배고플 때 쌀알 한 톨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할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목숨과 우리 목숨을 바꾼 건 아닌가 생각하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강디모데 기자  jcnk1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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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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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6-02-05 16:19:46

    북한에서는 말이없고 정직한사람들은 모두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한다~!!!! 무조건 거짓말잘하고 아첨을 할줄알아야 살수있는 나라다~!!!! 그래서 고난의행군시기 정직한사람들 모두 굶어죽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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