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윤동주가 있다. 소년시절을 옛 고구려 땅 만주 북간도에서 자라서 그랬을까, 그는 서정시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선구자 중의 한 분이다. 일제 압박에 대항해 민족혼을 노래하다 불과 27세의 어린 나이에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비극의 저항시인. 그래서 그분을 생각할 때면 늘 가슴 한 편이 아려온다.

일본에 점령당한 조국을 떠나 윤동주와 함께 1920년대 북간도 명동촌에서 자란 인물 중에 윤극영이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의 <서시>나 <별 헤는 밤>과 같은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를 읽었겠듯이, 우리 모두는 또 윤극영의 동요를 부르고 자랐다. 바로 <반달>과 <까치까치 설날은>이 그의 대표작이다.
 
나 어릴 적 내 고향 서울 성동구 구의동(현재는 광진구 구의동)에도 설날이 오면, 나 역시 윤극영의 <까치까치 설날은> 노래를 부르며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세배를 다녔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 /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 우리들의 절 받기 좋아하셔요.”
 
60년대 말~70년대 초 당시의 서울 구의동은 시골이나 다름없을 만큼 한적한 전원 풍경이었다. 이른바 명당이라는 배산임수의 마을로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에는 아차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 동네에 우물이 아홉 개가 있다하여 붙여진 구정동(九井洞)의 ‘구(九)’와 산기슭 동네라 하여 붙여졌다는 산의동(山宜洞)의 ‘의(宜)’가 합쳐진 이름이 내 고향 ‘구의동(九宜洞)’이니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지금이야 물론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로 인해 아차산 조차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변해있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 겨울에는 우리 동네 한강변에서 썰매와 스케이트를 탔었고,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지는 정월 초·중순에는 강둑과 논둑에서 쥐불놀이를 즐길 만큼 목가적인 곳이었다.
 
그 구의동에서 나는 4남4녀 형제의 막내로 자랐다. 대가족이었다. 그래서 내가 서열상 꼴찌인지라 모든 것이 뒤로 밀려났을 것으로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집에서는 가히 내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줄줄이 위로 있던 형님과 누님 모두 나를 막내라 귀여워하셨고, 그래서 내 떼쓰기가 통할 수 있었으며, 그런 막강한 위세 때문이었는지 설날에도 내가 받은 세배 돈이 가장 두둑했다.
 
어린 시절 내가 설날을 눈곱아 기다렸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풍성한 설 먹거리였고, 다른 하나는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설빔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는 세배 돈이었다.
 
특히 설날 세배 돈이라는 것은, 돈을 만져볼 기회가 별로 없던 어린 시절에 ‘큰 재산’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래서 세배 돈의 많고 적음으로 우리 꼬마친구들의 서열과 신분이 정해지기도 했다. 세배 돈을 많이 받은 친구의 위세는 한동안 대단했었으니까. 당시 우리들이 집안이나 마을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녔던 가장 큰 목적은, 대부분의 독자들도 공감하시겠지만 세배 ‘돈’에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설날 전에도 미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물론 집안과 마을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녀오시곤 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것이 섣달그믐 무렵, 그러니까 음력으로 묵은해를 보내며 어른들에게 지난 1년의 보살핌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묵은세배’였다. 윤극영의 동요에 나오는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의 어저께가 바로 그 묵은세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그 ‘까치까치 설날’에 어머니는 ‘우리우리 설날’에 대비해 차례상 음식준비를 하셨고, 아버지는 밤과 기타 과일을 손질하시면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지방(紙榜)을 붓글씨로 쓰셨는데, 그때 늘 여러 장의 봉투에 깨끗한 10원짜리, 100원짜리 지폐를 세어 넣곤 하셨다.
 
당시는 10원짜리 지폐가 통용되던 때였다. 짜장면 한 그릇이 30원 하던 1970년대 초 무렵이었으니까 지금의 짜장면 값으로 환산한다면, 당시 100원의 세배 돈은 현재 15000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따라서 당시 어쩌다 5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세배 돈을 받는 날은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로또 당첨이 아마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었다.
 
역시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뿐 만 아니라 구정동 윗말이나 주막거리의 어른들 댁에도 찾아가 묵은세배를 드리면서 세배 돈 봉투를 드렸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어른들에게 용돈을 드리는 풍습이었다. 거기에는 또 함께 어울려 사는 홍익인본주의의 의미가 크게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40이 넘은 나이에서야 알게 됐다. 새해에는 더욱 주변을 돌아보며 상생의 마음가짐과 겸손의 몸가짐을 다짐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바로 ‘묵은 세배 돈’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 소득의 재분배기능이자 사람 사는 훈훈한 정감의 교류 시스템이었다. 남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까치까치 설날’에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드린 묵은세배돈은 ‘우리우리 설날’에 ‘새세배 돈’으로 다시 되돌려지는 구조였다. 차례를 지낸 후 마을 아이들이 세배를 오면 세배 돈을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해드린 배려였다.
 
또한 아버지가 마을의 어떤 어른을 찾아가 묵은 세배 돈을 드렸던 것은 세배 돈을 줄 형편이 안 되는 그 어른도 누군가에게 떳떳이 세배 돈을 줄 수 있도록 하거나, 행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설날 조상들에게 차례라도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해 상차림비를 슬쩍 놓고 가는 이웃돕기 성금 차원이기도 했다. 연말에 펼쳐진 훈훈한 평등주의 풍습이었다.
 
그러니까 자선행위일수록 받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고려했던 것이 우리 민속설의 세배 돈이었던 것이다. 명분 없이 그냥 돈을 줄 수는 없으니 ‘까치까치 설날’을 만들어 그 설날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또는 형편이 좋은 사람이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감사의 세배를 하게하고, 작은 촌지를 전달하게 한 것이 바로9000년 역사의 우리 민족이 간직해온 홍익인본주의의의 정신이었다.
 
연말 거리에는 구세군(救世軍)의 자선냄비가 걸리고 종소리가 울린다. 서양에서 유래되었다는 그 구세군이 창설된 것은 1870년경으로 고작 14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연말연시 우리 고유의 세배문화 기록은 삼국시대에도 등장하니 최소한 1500년 전부터 있었던 일이었다. 그 만큼 우리의 홍익인본주의는 뿌리가 깊었고, 세계적인 홍익인본주의 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번 까치까치 설날에 윤동주 시인을 찾아가 묵은세배를 드릴 예정이다. 그가 다녔던 연희전문(현 연세대) 교정에 있는 그의 시비(詩碑)를 찾아 돌에 새겨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기도하려 한다. 옛 시인에게 묵은 세배 돈을 드리는 대신 그 자리에서 나는 세배 돈에 스며있는 홍익인본주의를 제4의 자본주의시스템으로 확립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드리려 한다.
 
재물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윤동주 <서시>의 시구처럼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말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행복을 나누겠다는 나와 우리 친지들의 의지는 강하다. 구세군 조직이 전세계 8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창설되었다고 하듯이 우리 행복군(幸福軍)도 올해는 세계로 규모를 확대하려 한다. 

연말연시에 하늘의 신에게 무사고를 기원하며 절하던 전통이 윗사람과 주위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는 풍속으로 변했다는 것이 우리의 세배문화였다. 나 역시 내 졸고를 읽어주시는 칼럼 독자들에게 이 기회를 빌려 글로서나마 감사의 세배를 올리며, 새해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큰절!  
 

노규수_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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