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권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동시대인으로서 함께 느끼며 살아가는 당신이 유빕이다.
다리 꼬는 명장면으로 샤론 스톤을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르게 한 <원초적 본능(1992)>은 정사와 살인의 융ㆍ복합으로 섬뜩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동시에 보여주며 흥행에도 성공한 공포영화다.
크리스테바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스타의 광기도 호기심 등 단순히 개인적인 것에서 찾지 않고, 보다 본질적인 인간 정신의 기원 내지는 원초세계에서 찾게 되었다.
◇ 언어 이전에 기호 있다
인간의 이성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징계의 경계 바깥, 즉 ‘여백’으로 밀어내고 추방시켰던,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욕망의 덩어리가 바로 아브젝트(abject)이다.
사실 인간은 아무런 경계 없이 태어나 나와 주변이 하나인 상태에서 충만함과 일체감을 경험한다. 우리는 주체성 확립을 위해 아브젝트를 몰아내며 경계를 만들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아브젝트는 완전히 추방되지 않고 주체 주변에 남아 정체성을 위협한다.
즉 아브젝트는 사회질서 체계를 세우고 바로잡는 언어중심의 상징계가 요구하는 올바른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지고 경계 밖으로 추방된 기호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여백’(기호계)에 있던 그 아브젝트가 상징계 내부로 어느 순간 구멍을 뚫고 들어와 사회적 금기, 곧 '절대적인 것'에 의한 질서를 교란시키며 불안을 초래하지만 이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이 되는 동시에, 이것 없이는 상징계 자체가 유지되기 힘든 존재의 근거이다. 이처럼 아브젝트는 혐오스러움(공포)과 성스러움(이끌림)을 지닌 양가적인 것이다.
<공포의 권력>에서 크리스테바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의식(儀式)들 속에서 행해지는 정화작용의 본질이란 바로 '아브젝시옹'을 통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다양한 카타르시스(아브젝트의 정화 혹은 추방행위)가 종교의 역사에서 발견된다고 밝혔다.
나아가 기독교가 위기에 처한 서구의 근대 사회에서는 종교적인 제의 대신, 예술이 성스러움의 의미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제 아브젝트가 예술로 넘어가면서 예술에 의하여 공포가 정화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상징계의 지배적인 질서에 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원초적 본능>에 열광하는 근본 이유가 바로 이 아브젝트가 지닌 양가성과 아브젝시옹 곧 존재질서에 대한 저항 내지는 정화를 생생하고 매력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샤론 스톤, 그녀는 예뻤다.
◇ 약물 이전에 사회약 있다
전통적으로 약(藥)의 경우, 식품의약품안전처나 FDA 등의 허가제도(상징계)를 통하여 약물(Drug) 이외에는 약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사회약(Social Medicine)은 경계 바깥으로 추방되어 왔다. 즉 사회약은 약물체계의 경계 바깥에 ‘여백’으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약인 셈이다.
1948년에 창설된 세계보건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는 그 이사회에서 1998년 1월, 제101차 세션으로 건강의 정의를 아래와 같이 새롭게 결의하였다:
'Health is a dynamic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spiritu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건강이란 육체적, 정신적, 영적 및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역동적 상태이지 단순히 질병이나 병약함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유효한 WHO의 건강 정의를 따르면, 필자가 주창한 사회약이야말로 약물의 한계를 극복하고 개인의 육체와 정신을 넘어 영적ㆍ사회적 측면까지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약의 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인류를 아름답게, 사회를 건강하게(인아사건)'라는 기치를 내걸고, 건강한 개인과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약물을 제외한 모든 것(예: 종교, 철학, 자연,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법, 제도, 문화, 외교 등)이 치료수단인 약(Medicine)으로 작동하는바, 이것이 바로 사회약인 것이다.
약물로 개인을 치료할 수는 있어도 사회를 치료할 수 없기에 사회약의 도래는 현미경 중심의 미시세계에서 망원경을 사용하는 거시세계로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므로 약학의 진화ㆍ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21세기의 현대약학은 약물에서 사회약으로 그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고, 인류사(人類史)적으로 60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약물의 독점체계가 비로소 해체된 것을 의미한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개인이든 사회이든, 약보다는 '건강(Health)'을 원한다. 현대의료와 사회약료는 개인과 사회를 치료하며 21세기 지구촌의 보건의료를 이끌어 나가는 쌍두마차로, ‘살아있는 문화권력(Culturally Living Power)’이다. 이번 COVID-19 사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공포의 권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동시대인으로서 함께 느끼며 살아가는 당신이 유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