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은 수평적 네트워크 지향형인가, 수직적 위계질서 지향형인가?

독창적인 관점과 해석은 독창적인 사상가의 전제조건처럼 간주된다. 힘에의 의지를 역설한 니체의 영향권 안에 있는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 1980)>에서 무의식이 다양한 힘들의 집합장소로서 세계사 즉 인류 문화의 지층 속에 숨어 있다고 보았다.

그의 문화 분석에 따르면, 무의식의 역동이 수많은 고원(高原. Plateau)을 만들어낸다. 즉 문화란 몸이요 ‘기관 없는 신체’이기에 오직 힘들만이 기계적으로, 혹은 전쟁도 불사하듯이 비인격적으로 충동, 작동함으로써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되지 않고 부분대상 혹은 욕망하는 기계들 자체로 접속될 뿐이다.

그것은 배아 상태의 알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사회체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동일성이 부여된 인격적 주체는 아니다. 주체는 욕망들의 연결과 분리를 통한 접합접속의 결과로 발생하는 통일적 효과이지만 욕망은 언제나 인간적 구속(통제), 가족 삼각형 및 사회 제도를 넘어 분열증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다.

한편 들뢰즈는 문화의 지층에서 이 무의식적 힘들이 어떤 방식으로 뻗어나가는지에 관하여 식물로부터 통찰을 얻었다.

 

▲ 죽대의 뿌리줄기. 리좀(Rhizome)이라는 뿌리줄기의 속성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정착하는 일반적 나무들과 달리 가지가 흙에 닿아서 뿌리로 변화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확산하는 脫영토화 번식력이 강하다. 4만의 병사로 2500만 유럽인을 지배했던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의 특성이 바로 “관계 지향성과 유동성이 강한 리좀 형태의 네트워크 체계와 같다”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편집자 주)
▲ 죽대의 뿌리줄기. 리좀(Rhizome)이라는 뿌리줄기의 속성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정착하는 일반적 나무들과 달리 가지가 흙에 닿아서 뿌리로 변화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확산하는 脫영토화 번식력이 강하다. 4만의 병사로 2500만 유럽인을 지배했던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의 특성이 바로 “관계 지향성과 유동성이 강한 리좀 형태의 네트워크 체계와 같다”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편집자 주)

 

◇ 식물 : 리좀형 vs 수목형

 

원래 리좀(Rhizome)은 뿌리줄기를 의미한다. 리좀은 가지가 흙에 닿아서 뿌리로 변화하는 지피식물들을 표상한다. 이에 반해, 수목형은 뿌리와 가지와 잎이 위계를 가지며 기존의 수립된 계층적 질서를 쉽게 바꿀 수 없다.

리좀은 중심이 없기에 뿌리가 내려 있지 않은 지역이라도 (어디에서나) 번져나갈 수 있는 번짐과 엉킴의 형상을 지지한다. 즉 리좀형은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분류체계가 아닌, 관계지향적이며 유동성이 특징인 네트워크 체계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국회의원은 독립적인 개체성이 확보된 입법기관이기에 누구나 자유로운 횡단과 소통으로 국민을 위하여 창조적이며 다양한 법안을 발의할 수 있다.

특히 철학에서 이데아를 주창한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통일된 질서의 사유는 수목형 체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문화의 표면만 볼 뿐이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로 흐름의 지층을 형성하는 형식은 수목형(질서ㆍ코드화ㆍ영토화ㆍ정착)이 아닌 리좀형(무질서ㆍ脫코드화ㆍ脫영토화ㆍ탈주)이다. 즉 하나로 통일된 지층은 없다. 들뢰즈가 수목형을 해체하고 리좀형 사유체계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배치 :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이 바뀐다'

 

생성과 변이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분열증적 흐름 속에 있다. 흐름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보려면 그 흐름을 잘라내서 절단면을 봐야 한다. 또한 전체의 일부분에 해당되는 그 절편들에 의하여 고원(高原)을 형성하는 다양한 배치를 알게 된다.

예컨대 축구공은 축구공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경기 도중 우리 편 선수에게 날아가면 ‘패스’가 되고 잘못 차서 다른 편 선수에게 가면 ‘패스미스’, 골 그물을 흔들면 ‘골인’이 된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다른 것과 하나의 계열을 이루어 연결되는 것이 ‘계열화’이며, 공시적(共時的)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계열(절편)이 곧 배치인 것이다.

역으로,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 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한다. 입은 식당이라는 배치 안에서 ‘먹는 기계’가 되고, 강의실에서는 ‘말하는 기계’가, 침실에서는 ‘섹스 기계’가 된다. 또 배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항을 자기 안에 포섭하여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영토화’와 거기서 벗어나는 ‘脫영토화’가 이루어진다. 고로 배치는 탈주도 내포한다.

여기서 탈주란 주류 혹은 다수자(지배자)로 하여금 도망가도록, 즉 변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내가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니체는 근대 철학이 물러가도록 만드는 탈주의 사유로 마침내 탈근대 철학의 문을 활짝 열었다.

사실 탈근대의 출발점은 무의식의 발견이기에 프로이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고는 정신분석(의식계)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탈근대의 껍질을 깨고 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한편 칭기즈칸은 유목민으로서 '城을 쌓지 말라'는 탈주의 정복원칙으로(아시아 및 유럽 세력이 도망감) 몽골제국을 건설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침략자가 아닌 창조자다.

요컨대 무의식은 힘에 의하여 배치되는 것이다. 욕망의 배치에 따라 선량한 시민도, 파시즘도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문화는 리좀형 사유와 더불어 내부혁명의 실천에 의하여 수천 개의 고원으로 나타날 수 있다.

 

◇ 노마디즘(Nomadism) : 아모르 파티의 영원한 변주

 

노마디즘은 무의식이라는 근원적인 움직임(動)에 기반을 둔 유목주의다. 즉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삶의 영토, 다른 삶의 방식, 다른 가치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들을 유목민(노마드, nomad)이라고 하는데 유목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체의 방식을 유목주의라고 한다.

유목민은 내부 보다 바깥을 소중히 여기므로 한 곳에 정착,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에서 새로운 곳을 향하여 나아간다(脫영토화). 변화나 기존 질서가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가치와 보다 나은 세계를 선도하기 위한 탈주를 감행하는 자가 노마드다.

헤겔은 인간의 존재 이유인 동(動)ㆍ욕(欲)ㆍ쟁(爭)의 動에서 '동일성의 철학'으로 가져갔으나, 들뢰즈는 이를 거부하고 動에서 '차이와 반복의 철학'을 세우면서 끊임없는 생성과 변이, 탈영토화와 탈주의 노마디즘을 강조한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다음 세기 인간의 모습은 유목민이라고 정의했다. 정보사회에서 현대인은 특정한 환경과 정보에 고정돼 있는 정착민이 아니라 쉴 새 없이 길과 정보를 찾아 헤매는 유목민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의 칸트는 모든 것을 이성(주체)으로 수렴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들뢰즈는 모든 것을 무의식(욕망)으로 수렴했다. 고로 들뢰즈는 '21세기의 칸트'로 그 추종자들과 함께 즐겁게 선을 넘는다. 오늘도 성(城)을 쌓는 대신, 선(線)을 넘는 당신이 유빕이다.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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