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스페셜
"죽음? 그까이꺼..."탈북자 조수아씨가 체험한 북한 교화소, 죽음 그리고 신앙

신정동 아파트 조수아(36)씨 집을 찾았을 때는 초가을 오전이었다. 무더운 날씨도 아니고 그렇다고 쌀쌀한 날씨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파트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기자가 인터뷰하러 오니까 그랬나보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항상 이렇게 열어놓습니다. 제가 뭐 죄짓고 사는 것도 아닌데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래도 한창 성폭행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되고, 더군다나 조씨는 탈북 여성 아닌가. 언제든 위협을 느끼고 있을 텐데 대낮에 현관문을 열어놓는 뚝심이 놀라울 뿐이었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지요 뭐. 저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주님의 딸인데 누가 감히 저를 어떻게 하겠어요?”

   
▲ 조수아씨의 서울 신정동 집 풍경. 이제 5개월 된 아기 최민권은 쿨쿨 자고 있고, 조씨는 TV 방송 출연 때문에 전화 통화에 여념이 없다. ⓒ유코리아뉴스 김성원

여러 탈북자들을 만났지만 초면에 처음부터 신앙 얘기를 하는 건 조씨가 유일한 것 같다.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부터 애인처럼 의지할 사람을 만났다면 지금 같은 신앙은 갖지 못했을 거예요. 처음 이 집을 배정받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빈 장판, 빈 벽을 바라보며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만 했어요. 그렇다고 자존심이 있으니까 어디 가서 TV나 옷을 달라고 할 형편도 못됐어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면서 대학까지 다니다보니 책 살 돈도 없고 절망적이었죠.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만 붙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조씨는 2006년 11월 홑몸으로 한국에 왔다. 기초생활수급자 신세인데다 대학(연세대 간호학과)까지 다녔다. 생활도 어려운데 대학 학비까지 필요했으니 형편이 어땠을지는 훤하다. “차비 1000원이 없어서 신촌에서 신정동 집까지 7~8시간 거리를 걸은 게 스무 번이 넘어요. 걸으면서 8시간 내내 운 적도 있어요. 사과 세 알에 1500원 하는 걸 사먹을 돈이 없어서 수퍼마켓 앞을 알짱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유혹도 많았다. 50대 남성이 ‘외롭다’며 접근해오기도 하고, ‘2년만 동거해보자’며 다가오는 총각도 있었다. 다들 돈으로 꾀려 했다. 조씨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예 욕을 하며 내쫓았다. 생활도 마음도 너무나 힘들어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죽을둥 살둥 공부에 매달렸다.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던지라 영어는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하루 2~3시간 자면서, 학교 의무실 신세까지 지면서 악착같이 공부를 파고들었다. 공부마저 못하면 죽어버리고 말 거라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첫학기가 끝나고 성적이 나왔다. B⁺. 조씨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씨는 북한에서 늘 최우등, 수석만 차지했었다. ‘역시 못사는 나라에서 오니까 확실히 실력 차이가 나네’ 마치 남한 학생들이 이렇게 비웃을 것만 같았다. 교수를 찾아갔다. 다짜고짜로 “공부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교수가 달랬다. “전국에서 1~2등 하는 학생들이 모여서 그 중에 C, D 학점 맞는 사람도 많은데 B⁺면 상당히 잘 한 거야. 그만하면 상위권이지.” 그 말로 수그러들 조씨가 아니었다. “이 점수가 무슨 상위권입니까. A학점은 되어야지 상위권이지.” 교수가 다시 타일렀다. “오늘은 B⁺지만 다음 학기엔 꼭 A 맞을 수 있을 거야.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조씨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생명을 바치듯 최선을 다했던 공부인데 다시 A 학점을 받기 위해 공부하려니 영 자신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찾아간 곳이 집 근처 목동 지구촌교회(조봉희 목사)였다. 매달릴 수 있는 게 하나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벽에 걸린 조씨의 스케줄 표. 간증과 강연, 방송 출연으로 한 달 일정이 빽빽하다. ⓒ유코리아뉴스

조씨는 그 교회에서 비로소 인생 행복을 찾았다.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신앙이 행복의 비결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조씨의 남편 최덕종(43)씨는 원래 레슬링 선수였다. 잠깐 국가대표를 한 적도 있지만 이름을 날리지 못한 무명 선수였다. 지금은 고철 사업을 하고 있지만 벌이가 변변치 못하다. 더군다나 조씨는 서울의대를 다니다가 아기를 키우느라 학업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조씨의 얼굴에선 ‘행복 만땅’이란 글자가 선명해 보였다. “남들 보기에 잘 살지는 않아도 지금 너무 행복해요. 돈이나 물질이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 우선순위로 살아가느냐, 그게 행복을 좌우하는 것 같아요.”

수년 전만 해도 조씨에게 이런 행복은 꿈에도 없었다. 아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처지였었다. 조씨는 북한에서 의대를 나오고 외과의사로 일했다. 아버지는 고위직 당 간부였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수많은 인민들이 굶거나 죽어간다는 말은 남 얘기였다. 북한 정권에 대해 추호의 불만도 없었다. 한번은 친구를 따라 중국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통역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자수하면 용서해준다’는 말에 제 발로 북한엘 걸어 들어갔다. 조씨는 지금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중국에서 공안에 붙잡혀 북한에 간 게 아니에요. 제 발로 찾아갔어요. 아마 북한이나 대한민국에 있는 탈북자 중에 나 같은 사람 없을걸요. 그런데 ‘자수하면 용서해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신의주 보위부에서 이튿날 곧바로 저를 청진에 있는 수송교화소로 넘겨버렸어요. 교화소는 정치범 수용소입니다. 전거리교화소, 화성교화소가 모두 정치범 수용소지요.”

교화소에 들어가자마자 고문이 시작됐다.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에 각목을 끼운 채 꽁꽁 묶였다. 발에는 10㎏도 더 되는 족쇄가 채워졌다. 이 상태에서 가죽벨트로 의식을 잃을 때까지 때렸다. 의식을 잃으면 물속에 집어넣고, 의식이 돌아오면 또 맞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거칠거칠한 옥수수 껍질을 수십 장 던져주면서 ‘네가 이 땅에 태어나서부터 이날까지 지은 죄를 곰곰이 생각해서 죄다 적으라’고 했다. 그냥 적는 게 아니라 연도, 날짜, 요일, 시간, 분 단위까지 적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분은커녕 시간이나 날짜, 연도도 가물가물할 것은 뻔한 이치. 그러면 또 때렸다. 하도 맞으니까 나중엔 속에서 욕이 나왔다. 별의별 욕이 다 터져나왔다. 악에 받친 것이다. “이 XXX들아 나는 지시한 대로 자수한 건데 왜 때리냐” 그랬더니 또 때렸다. ‘주둥아리가 살았다’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면 다 짐승 취급을 받습니다. 거기서 예심(판결을 준비하는) 기간 40일이 끝나면 공개 처형되는 겁니다. 그 동안 조서를 꾸미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거죠. 물론 그 기간 안에 고문으로 죽어나가면 그걸로 끝이죠. 그리고 조서에 따라 죄가 정해지면 딸린 가족들은 생매장이냐 처형이냐 추방이냐가 결정되는 거죠.”

중국에 잠깐 놀러간 죄가 이렇게 클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중국에 잠시 머물면서 조씨가 한 일은 통역. 북한 당국은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저는 한국이란 말을 교화소에서 처음 들었어요. 그게 남조선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한국은 지구상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나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국 사람 대상으로 통역했다’고 하니까 ‘입닥치라. 그게 어떻게 한국이냐 남조선 OOO들이지’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남한 사람들 대상으로 통역을 했으니 간첩질이라는 거죠.”

   
▲ 조수아씨가 자신이 지나온 과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조씨가 수송교화소로 끌려간 날은 2005년 3월 3일. 조씨는 처음부터 밥은커녕 물도 마시지 않았다. 너무나 억울했던 자신의 처지를 금식으로 호소하기 위해서다. 62㎏까지 나가던 몸무게는 얼마 되지 않아 26㎏로 팍 줄었다. 나중엔 폐렴 말기까지 갔다. 조씨가 살아서 교화소를 나갈 거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조씨 자신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다.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혀를 끊으려고도 했다. 의지는 강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옆방의 한 남자는 30㎝ 대못 8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조씨는 절규했다. 그리고 북한을 저주했다. 북한의 실상이 어떻다는 걸 비로소 봤던 것이다. 하나님을 찾았다. 아니 찾을 대상이 하나님밖에 없었다. 이미 조씨는 중국에 있을 때 조선족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들었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어쩌다 이 땅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북한을 저주하면서 울며 기도했다. “제가 살아서 이 사실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소서. 이 땅을 저주하게 하소서.”

의식이 깨어 있을 때는 무조건 기도했다. 기도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러던 조씨에게 느닷없이 방언이란 게 임했다. 자신이 방언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 건 조서를 꾸미는 방에 끌려갔을 때였다. 거기엔 조씨가 교화소에서 했던 모든 말과 행동거지가 낱낱이 문서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크라사타마….’ 조씨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물었어요. ‘나도 모르는 말’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몰랐으니까. 남성놈들과 통하는 암호냐고 묻길래 ‘처음 보는 말’이라고 했어요. 간수들은 그때부터 저를 이상한 말을 하는 ‘미친 여자’ 취급하기 시작했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밥도 안먹는 데다 내뱉는 말들이 다 이상한 말들이었으니.”

사실 교화소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미치지 않고서는 베기기 힘든 곳이었다. 그곳에서 ‘미친 여자’ 조수아는 신앙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한번은 기도 중에 성경 구절이 생각난 적도 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여호수아 1장 5절, 이사야 41장 10절 등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선명하게 기억나게 하신 것이다.

살아서 나가기가 불가능보다 더 어렵다는 교화소. 조씨는 어떻게 해서 그 교화소를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조씨의 표현대로 ‘기적’이었다. 조씨는 이미 교화소 안에서 ‘시체 사인’이 난 상태였다. 시체 사인은 ‘도무지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상태’ 즉 주검과 마찬가지라고 교화소 측에서 결론을 내린 걸 의미했다. 조씨의 오빠를 잘 알던 교화소 직원이 오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결국 오빠의 노력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완전한 석방은 아니었다. 교화소가 아닌 일반 병원으로 장소를 옮겼고, 몸이 회복되면 언제든 다시 교화소에 재수감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조씨는 일반 병원으로 옮긴 지 5일만에 2층 병원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감행했다. 몸이 다시 회복된다는 건 교화소로 다시 돌아간다는 걸 뜻했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봤던 것이다. 목적지는 고향 온성이었다. 거기서 숨어 지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청진에서 온성까지 가는 데는 12개의 초소를 통과해야 했다. 군대에서 장교 복무까지 했던 조씨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통행증명서도 있어야 했다. 더군다나 그때 조씨의 외모는 유달랐다. 중국 물을 먹은지라 청바지에 웨이브 모양의 노랑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장교를 만났다. 군대 시절, 조씨를 짝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배려로 조씨는 무사히 12개 초소를 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외모 때문에 결국 온성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거기서 조씨는 ‘여기(북한)는 내가 살 곳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결국 탈북을 결심했고 결행했던 것이다. 조씨는 2006년 11월,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가끔 제 자신에게 되물을 때가 있어요. ‘하나님이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을까?’ 그럴 때마다 내가 보고 경험했던 것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똑똑히 증거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죠. 잘 나가는 외과의사에다가 고위직 외동딸에 맨날 ‘북한이 좋다’고 하고 다니니까 하나님께서 ‘그럼 어디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경험해 봐라’며 저를 교화소에 밀어 넣은 것이라고 봐요. 교화소에서 비로소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은 거죠. 탈북자들 중에 아직도 ‘하나님은 안보인다. 그건 미신이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그건 당신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절박하지 않다는 뜻이다. 아직까지는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살 만 하기 때문이다’라고요. 60년 동안 김일성 신(神)을 주입받아온 북한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믿음이 심어지면 남한 사람보다 훨씬 견고하게 신앙생활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결국 통일한국과 선교한국의 귀한 자원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봤기 때문일 것이다. 조씨의 신앙과 삶은 똑부러진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그렇다 보니 주위 탈북자들에게 쓴소리를 많이 한다. 특히 신앙인 탈북자들을 향해 ‘분명한 신앙을 가지라’고 고언을 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거짓말 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 도저히 용서가 안돼요.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하나님 믿는다, 목사다 전도사다, 주님의 일을 한다, 그런 얘기를 하면 안되요. 하나님께서는 2만 5000명 탈북자 중에서 한 명이라도 당신을 올바로 믿고 섬기는 사람을 찾으시지 이쪽저쪽 양다리, 세 다리 걸치는 사람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북한선교 한다고 많이들 하고 있지만 진실되게 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조씨는 2010년 결혼과 함께 혼인신고를 했다. 남한 사람에겐 당연한 절차지만 탈북자에겐 쉽지 않은 결정이다. 남한 사람과 결혼했다는 신고와 함께 정착지원금은 물론 자녀들 장학금 혜택도 못받게 되기 때문이다. 고민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남한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결행한 것이다. “솔직히 정착지원금을 받을 때는 생활에 큰 보탬도 되고 좋았어요. 막상 끊기고 나니까 아쉽고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실향민들(6·25 전후로 남하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왔을 때는 정부에서 하나도 지원 안해줬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 대부분이 다 성공했습니다. 어려운 시절 거치면서 다 잘 정착하셨습니다. 지금 주위의 탈북자들 보면 혼인신고 안하고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생활이 문란하고 일도 제대로 안하려고 합니다. 사회 문제가 되는 거죠. 지금의 탈북자들은 과거 실향민들의 모습에서 반성하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조씨는 교회 간증뿐 아니라 안보 강연, TV 인터뷰 등을 가장 많이 하는 탈북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북한의 지도자를 겨냥한 과격한 용어나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조씨는 일절 그런 표현을 입에 담지 않는다. 북한의 지도자가 나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 터무니가 없어 헛웃음을 주는 탈북자들을 자주 봐왔기 때문이다. 이들 탈북자들을 통해 남한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고, 이것은 결국 탈북자에 대한 불신으로 되돌아온다는 게 조씨의 판단이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북한의 실상이 어떻고, 지금 남한의 탈북자들의 현실과 바람이 뭔지를 알리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 북한선교의 방향도 이제는 탈북자를 향해 틀 때가 됐다는 게 조씨의 간곡한 당부다. “하나님께서 탈북자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탈북자들 통해 통일을 이루고, 궁극적으로 세계선교를 하라고 보내신 겁니다. 탈북자들 위해 중보하고 투자하고 섬기는 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탈북자들에게 돈을 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탈북자가 왜 남한사회에서 공부해야 하고, 취업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주고, 방법을 가르쳐주라는 겁니다. 명절이나 생일 때는 초청해서 밥 한 그릇이라도 나눠먹는 것, 그게 저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탈북자들에게 ‘돈을 주는 곳’으로 인식돼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라는 인식이 들게 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 말씀 배우는 곳이란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탈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제자로 키울 때 탈북자는 비로소 통일의 일꾼, 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조씨는 탈북자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이야말로 탈북자 정착의 핵심이라고 보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 목적을 찾게 되고, 그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내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공부하랴 아기 돌보랴 바쁜 일정 속에서도 목동 지구촌교회에서 7~8명의 탈북자들을 양육하고 있다. 조만간 (사)남북희망나눔연구소도 설립할 예정이다. 탈북자들의 정착·취업·진로 상담을 통해 조기 정착을 돕기 위해서다.

   
▲ 조씨가 2010년 12월에 받은 대통령 표창. ⓒ유코리아뉴스

현재 서울대 의대에서 가정의학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조씨는 내년 쯤 의사고시를 볼 계획이다. 기회가 되면 로스쿨도 공부할 참이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조씨는 어떤 식으로든 탈북자로서 남북한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남한뿐 아니라 북한의 의료체계의 기초를 새로 세우는 보건복지부장관을 꿈꾸고 있다. 남한에서 의사고시 하나만도 벅찬 일일 텐데 거기다 로스쿨까지 하겠다니 의문사와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나왔다.

“공부가 재미있으니까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공부인 만큼 공부 하나에 목숨 걸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탈북자니까 봐주겠지’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남한 대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하고, 당당하게 실력을 인정받을 겁니다.”

조씨는 이같은 노력 때문에 2010년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성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