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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제 큰정치 하러 왔습니다"배기찬(참여정부 청와대 국정팀장) 교수가 제시하는 뉴코리아

배기찬(50) 교수는 자칭 ‘NK 순회 전도자’다. NK는 ‘New Korea' 그러니까 통일된 새로운 남북한을 뜻한다. 그렇다면 NK 순회 전도자가 하는 일은 뭘까. 최근 서울 시내의 한 찻집에서 만난 배 교수는 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NK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비전을 전하는 것이죠. 저는 어딜 가나 ‘회개하라 통일 새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제일 먼저 외쳤던 말과 비슷합니다. 이제부터 회개하고 천국을 받아들일 준비를 본격화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죠. 지금은 실제로 ‘New Korean’으로 살기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New Korea는 어느 시점에 오는 게 아닙니다. 북한이 붕괴되고 나서 통일되고 나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New Korean으로 살아가는 순간 New Korea는 시작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처음에는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다가 나중에 공생애 기간이 지날 즈음에는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New Korea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난 배기찬 교수. 그의 답변은 질문과 함께 마구 쏟아져나왔다. ⓒ유코리아뉴스 구윤성 기자

배 교수는 NGO, 즉문즉설, 저서 등을 통해 통일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는 법륜(평화재단 이사장) 스님과의 친분이 각별하다. 1986년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온 뒤 배 교수는 연구활동을 했다. 그때 법륜 스님이 설립한 한국불교사회연구소와 연관을 맺게 됐다. 당시만 해도 배 교수는 기독교보다는 불교에 더 호감을 갖고 있었다. 1990년부터는 국회 정책비서관으로 일했다. 외교통일위, 법사위, 상공자원위원회, 교육위 등에서 두루 전문 경험을 쌓았다. 95년 7월엔 도쿄대 객원연구원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돈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했다는 게 배 교수의 설명.

“도쿄대 도서관에 아침 문 열면 들어가서 밤 10시 문 닫을 때 나왔어요. 일본과 중국 관계, 동아시아 관계를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일본 원서를 500권 정도 읽은 것 같아요. 동아시아 전체에 대한 일본의 연구 자료가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랐죠.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스페인, 포르투갈의 영향에 대한 자료도 있었어요. 심지어 1500년 전, 삼국시대와 왜의 관계에 대한 자료도 있었죠. 한국에 있었으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 귀한 자료들이죠. 연구를 끝낼 때 쯤 A4 용지 70~80매 분량의 논문을 썼는데, 그걸 토대로 쓴 책이 2005년 출간된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위즈덤하우스)예요.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제목은 ‘코리아의 운명’이었어요. 과거만 이야기하면 역사지만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칭해서 부를 땐 운명이라고 하지요. 저는 늘 궁금했어요. 과연 코리아가 도대체 어떤 운명인가. 국제관계, 남북관계 연구소에서 일을 할 때도 ‘우리나라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늘 궁금했어요. 코리아의 운명을 탐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게 일본 유학, 이후 저서로 연결이 된 것이죠.”

   
▲ 총선 패배 직후인 2005년, 배 교수가 일본에서의 유학 때 연구한 것을 토대로 써낸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책표지.

‘노무현의 사람’ 배기찬
배 교수는 1990년대 국회에서 정책비서관을 했다. 특히 고 노무현 대통령과는 인연이 깊다. 해양수산부장관 자문관, 대통령후보 정책팀장, 대통령직인수위 전문위원, 청와대 국정과제 담당팀장의 이력이 모두 ‘노무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는 1990년대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러다가 2000년 총선에서 부산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는 걸 보고 저와 안희정, 이광재(이들은 정치 경력에 있어 배 교수보다 1~2년 후배들이다) 등이 노 대통령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죠.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저 보고 리더십과 정책을 담당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드렸죠. 책 ‘노무현이 만난 링컨’도 제가 기획했고, TV 토론 팀장도 제가 맡았습니다. 1인 3역을 한 거죠.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인수위가 만들어질 때는 인수위 전문위원으로서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을 기획했습니다. 3대 목표, 10대 대통령 과제를 제가 총괄해서 기획한 거죠. 저는 원래 ‘지역 통합’을 소신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는 한때 이수성 총리 동생인 이수인씨를 모신 적이 있는데 이분이 원래 대구 분인데 전남 보성에 출마해 당선되셨어요. 김원기 국회의장도 90년대 초반 제가 모셨었는데 그분도 국민통합을 외치셨죠. 2004년엔 제가 직접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지역 통합의 일환이었지요. 35% 득표를 했지만 아깝게 지고 말았어요. 낙마 후 시간이 많이 남으니까 책(‘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을 썼고, 책을 쓰고 나서 청와대로 간 거죠. 그때가 2006년 3월이었죠.”

그는 청와대를 끝으로 잠깐 충남대 겸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를 ‘배 교수’라고 호칭하는 것도 그때의 짧은 경력 때문이다. 하지만 배 교수는 스스로를 ‘박사가 아닌 석사’라고 말한다. 실제 배 교수는 서울대 동양학을 거쳐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가 최종학력이다. 오랫동안 연구했으면서 정치 현장에서도 활약한 배 교수. 그는 학자인가, 정치인인가, 아니면 사상가인가.

“기본적으로 연구를 위한 연구자는 아니죠. 늘 실천적인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경북 칠곡이 고향입니다. 82학번인데 당시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데모를 하면 정학 아니면 퇴학이었어요. 더군다나 칠곡이 얼마나 보수적인 고장인지 몰라요. 대학 갈 때도 부모님께 절대 데모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죠. 대학을 갔는데 데모가 일상이었어요. 저는 다짐대로 데모를 안하고 멀리서 바라보면서 고민을 주로 했는데 어느 날인가 여학생 몇 명이 머리채를 잡힌 채 전경들한테 끌려가는 걸 봤어요. 그냥 구경만 할 수도, 그렇다고 데모를 할 수도 없었어요. 갑자기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들더군요. 1학기 내내 고민했지만 결론을 못내렸어요. 여름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서 집안일 돕다가 밤에 옥상에 올라갔는데 하늘에 은하수가 쫙 펼쳐져 있었습니다. 우주의 무한성, 영겁의 세월 이런 게 생각이 나더군요. 그러면서 내 인생은 고작 60~70년인데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저는 고등학교 때 이과로서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형이 아파서 의대에 지원했었죠. 합격은 했는데 색약이어서 결국 떨어졌고, 재수 끝에 문과로 바꿔서 들어간 거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루를 살든 1년을 살든 내가 살아야 할 가치가 뭘까’ 가만히 생각하니 그건 사랑이더라구요. 그 사랑을 민족적으로 표현하면 통일이겠죠. 대학 1학년 때 별을 보면서 그 결론을 내린 겁니다. 그리고 2학기 시작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서 사랑을 강조한 분을 스승으로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리 시간에 배운 예수가 생각났어요. 예수의 사진을 얻어다 갖다놨죠. 또 중국의 묵자는 평화를 외친 사람이죠. 그래서 벽에다가 두 사람의 사진을 걸어놓고 아침에 일어나면 두 분께 인사드리고, 밖에 나갈 때면 ‘사랑을 실천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가서 조금씩 데모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을 위해서라면 민주화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렇게 해서 제 궁극적인 목적이 통일이 된 거죠. 내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통일이라고 본 거죠. 성경도 읽었었는데 구약은 읽지 않고 신약의 4복음서만 집중적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중 한 말씀이 참 의아했는데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었어요. 그걸 펴놓고 늘 성경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며 파고들었던 기억이 나요.”

점잖은 유학생의 지독한 신앙체험
성경에 대한 궁금증, 배 교수에게 그것은 신앙의 입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하버드 유학은 배 교수가 신앙을 갖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줬다. 그것도 뜨거운 신앙 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 배기찬 교수는 "지금은 뉴코리안들이 나서서 새로운 공동체, 즉 뉴코리아를 만들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수개월 전부터 이미 뉴코리안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유코리아뉴스 구윤성 기자

“96년 8월 말에 미국 하버드로 유학을 갔을 때였어요. 객원연구원으로 갔는데 한여름 기숙사에 가족 4명이 배치를 받았는데 냉장고도 에어컨도 없고 너무나 괴로웠어요. 물론 공부도 힘들었지만요. 그 힘든 과정에서 저절로 하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는 선배를 통해 처음엔 미국 교회에 나가고 나중에는 오후 시간에 한인 교회를 나갔죠. 교회 간 지 한 달 좀 지나서 한인 교회 수련회를 따라갔는데 한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철야기도를 하면서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가장 많이 했던 기도가 ‘내 죄를 용서해 달라’는 거였어요.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모세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는 걸 보며 나에게도 나타나 ‘기찬아, 네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해달라고 졸랐어요.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어요. 그때 갑자기 떠오른 장면이 당시 네 살 딸 아이에게 내가 발바닥을 때리며 화를 낸 기억이었어요. 그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주홍색 불덩어리가 날아와서 옆구리에 와서 콱 꽂히면서 조금 있다가 내 몸속에서 폭발하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엄청난 바람이 일어났고, 제 목과 눈, 코와 귀에서 불과 구름이 나오고 혀는 휘말려 방언을 하는 거였어요. 한참 그러다가 쓰러졌죠. 이것이 제 신앙 체험이었어요.”

배 교수는 미국 유학 1년도 채 안된 97년 봄에 서둘러 귀국했다. 뜨거운 신앙 체험과 함께 당시 식량난으로 큰 어려움에 처한 북한 동포 돕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에서다. 스티브 린튼 유진벨재단 회장이 하버드에 와서 강연했던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북한의 식량난이 극심하다는 걸 피부로 느낀 것이다. 그때부터 북한을 위해 금식기도를 했고, 이 금식기도운동을 한국에 와서 국민운동으로 전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97년 봄부터 매일 점심 금식을 시작했다. 김수환 추기경, 김진홍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법륜 스님도 만나 금식운동 동참을 제안했다. 그때부터 법륜 스님이 이끌던 정토회도 금식운동에 참여했다.

2007년 7월,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소식이 발표됐을 때는 실무조정 역할을 맡았다. 그해 10월, 수행원으로 북한에 가서 합의문 작성에 참여했다. 5명의 팀원 중 한 명이었다. 합의문과 설명문 작성이 다 끝난 시각은 10월 4일 새벽 2시. 배 교수는 그때의 심정을 “지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면서 감개가 무량했다”고 밝혔다. “대학 1학년 때 비전을 주신 것, 노무현 후보를 만나 되지도 않을 대통령에 당선된 게 저한테는 모두 간증이었어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기도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해 백화원초대소 안에 있는 호수로 걸어나갔어요. 북한 경비병이 총을 들고 서 있는데 저는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죠. 생명의 위협 같은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벅찬 감격과 감사가 제 속에 있었으니까요.”

“노무현 대통령 비서관에서 이젠 하나님의 비서보가 될래요”
2008년 2월 22일. 노 대통령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던 날이다. 배 교수는 그때가 ‘금요일’이라며 요일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배 교수는 충남대 초빙교수를 3년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짐은 박스채 잔뜩 차에 실려 있었다. 하지만 배 교수가 차를 몰고간 곳은 집도, 충남대도 아닌 수동기도원이었다. 부흥한국이 제1회 북한선교 캠프를 개최하는 장소였다. 그때 금요일 오후 마지막 강해설교를 오대원(한국예수전도단 설립자) 목사가 맡았었다. 배 교수가 부흥한국을 알게 된 것은 2006년 청와대 기도모임에 대표인 고형원 선교사를 초청하면서다. 캠프에서 오 목사는 “뒤로 물러서서 침륜에 빠지지 말고 나아가라”고 참석자들을 도전했다. 그때 기도하며 결심했다. 이젠 대통령 비서관 임기가 끝났으니 하나님의 비서가 되어 살겠다고.

“2001년 당시 제가 노무현 후보를 모실 때 노 후보는 전망이 없었어요. 그때 새벽기도회 가서 ‘하나님, 제가 뭘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는데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내 일을 하라’는 음성이 들려왔어요. 당연히 목사 되라고 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러니까 노 후보를 돕는 일을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었어요. 어쨌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별로 전망이 없었는데 대통령이 되셨어요. 그리고 나서 저는 대통령 비서관이 되었구요.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비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토요일 아침, 모든 캠프 일정이 끝날 때 제가 앞에 나가서 간증을 했어요. 하나님의 비서보가 되고 싶다구요. 영어로 했는데 ‘Assistant secretary to the God for Korea’였어요. 대통령 이취임식 후 노 대통령을 봉화마을에 모셔다 드리고 오산리금식기도원에서 3일간 금식기도 하며 하나님 앞에 비서관을 지원했어요. 3개월 안에 제가 모셔야 할 분이 나타나면 합격인 줄 알겠다고 기도했죠. 그런데 3개월이 지날 무렵 시애틀에서 연락이 왔어요. 오대원 목사님께서 같이 일하자고 하셨어요. 2009년 1월부터 시애틀의 안디옥선교훈련원 새코리아센터 책임자로 일을 하게 된 거죠. 그걸 올 1월에 마쳤고 이제부터는 누가 알아주지 않지만 ‘NK 순회 전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디든지 누구든지 저의 도움이 필요하면 가는 거죠. 순회하며 무엇을 전도하느냐가 중요한데 뉴코리아, 즉 이 뉴코리아는 New Israel,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 초기에 이스라엘을 통해 하시려고 했던 걸 이제 마지막 때 코리안들이 갖고 있는 겁니다.”

배 교수가 주창하는 뉴코리아도 나라의 개념일텐데, 그렇다면 그 나라의 이념이나 가치, 즉 지향점은 뭘까. “제가 만든 뉴코리아 기도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민족이 죄를 짓고 악을 행했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통일을 통해 새로운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 뉴코리아는 이게 통일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죠. 뉴코리아의 핵심가치는 거룩과 정의와 사랑과 평화입니다. 여기에 기반한 나라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열방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뉴코리아를 보시고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더라’라고 한다면 그 이상의 상상력과 에너지를 주는 비전이 있겠어요. 이걸 크리스천들에게 도전하고 싶은 겁니다.”

“뉴코리아? 아데나워, 브란트 같은 새독일인이 서독을 만들었듯 뉴코리안이 만드는 나라”
얘기를 들으며 궁금증은 끊이질 않았다. 한국이나 조선이라는 말도 있는데 굳이 한글이 아닌 ‘코리아’를 쓰는 이유는 뭘까. 배 교수는 한국이라는 명칭은 우리나라 역사를 포괄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뉴코리아’ ‘통일코리아’를 써야 한다는 것. 하지만 새로운 용어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타종교에게는 ‘종교 편향’ 논란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가 말하는 뉴코리아의 비전은 역사와 철학, 정치와 신앙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한줄기 사상과도 같다. ⓒ유코리아뉴스 구윤성 기자

“종교편향은 내용이 없이 형식을 부각시키니까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빛과 소금의 방법을 내놓으셨어요. 소금이 녹아서 배추 맛을 좋게 한다면 그걸 반대할 사람이 있겠어요. 통일한국을 앞두고 참 이스라엘을 찾아야 합니다. 그걸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이 뭔가요. 많은 크리스천이 구원에서 신앙이 끝납니다. 하지만 선교센터에 있으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깨달은 것은 구원은 첫단계이지 마지막 단계가 아니란 것입니다. 구원은 문턱입니다.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이걸 위해 우리가 붙들고 가야 할 핵심 가치, 헌법이 바로 새계명입니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죠. 이것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몇 달 동안 이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데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그 계명을 붙들고 가다보니 조금씩 달라집니다. 뉴코리아가 궁극적 내용이지만 출발은 새사람입니다. 새코리안들이 주도한 게 3.1운동이고, 그들이 만든 게 임시정부였습니다. 새로운 영을 가진 사람들이 새 사람, 새로운 운동을 벌이면 그걸 통해 새코리아가 만들어지는 거죠. 독일이 나치를 주도했지만 1945년 이후 아데나워, 브란트 등이 새독일인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나치 독일에 합류하지 않았고 이들이 만든 새 독일이 바로 서독이었습니다. 독일 헌법 1조가 바로 새독일인들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공권력의 의미이다.’ 독일통일은 다른 게 아니라 새독일에 서독이 먼저 갔고, 동독이 나중에 거기에 합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앙정부 말고 이젠 지방자치단체간 남북 연합 시작할 때”
뉴코리아. 정치학자가, 현실 정치에 몸담았던 정치인이 하는 얘기치고는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처럼 들렸다. 그것은 지나치게 신앙적이란 말도 된다. 물론 신앙과 현실을 따로 분리한다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설득이나 설명이 가능합니다. 어려운 게 아닙니다. 시대가 이제 때가 찼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납득하기 시작할 겁니다. 계절로 치면 이제 소한, 대한이 지나고 우수, 경칩을 맞고 있습니다. 즉, 봄이 온 것입니다. 때가 찼으니까 가속도가 붙을 겁니다. 크리스천 모두에게 이런 새로운 개념이 필요합니다. 이젠 외칠 때가 되었습니다. 비록 제가 예수전도단에 소속돼 일했지만 앞으로는 예수전도단뿐만 아니라 CCC도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남북간 결연, 즉 남쪽 10개 광역과 북쪽 10개 광역을 결합시키는 걸 완성했습니다. 손수건도 만들어 보급하고 있습니다. 기초단체, 즉 시군구 단위 연합은 그동안 진행을 안했는데 그것도 확정을 해서 지난 6월 6일 쥬빌리기도큰모임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200개 정도의 남북한 시군구가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이 열린 거죠. 뉴코리아와 함께 United Korea를 외쳐야 합니다. 남북의 통일은 남북 연합을 통한 단계적인 통일도 있는데 이건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겁니다. 반면 지역 자치단체별로 연합하는 통일도 있습니다. 이걸 지금부터 준비하자는 것이지요.”

배 교수는 이걸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분배에 빗대기도 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땅을 세세하게 배분했듯이 통일 이전에 구체적으로 남북한의 중앙정부, 지방정부, 그리고 그 지역에 소속된 교회, 기관,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북한 점령’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배 교수는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배 교수는 전국의 지차체를 찾아다니며 시장, 군수, 이장 등을 만나 남북 교류를 제안할 방침이다. 이렇게 5년만 교류가 된다면 남북한이 느끼고 있는 지금의 거리감은 훨씬 가까워질 거란 게 배 교수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궁금한 게 또 있었다. 혹시 배 교수가 정치에 뜻을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저는 큰 정치를 말하는 겁니다. 통일의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정치를 말하죠. 이것을 위해서 내가 활동하는 것이지 내가 국회의원 되고 대통령 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한번 하는 것, 정권 바꾸는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치에 몸담으면 정파적으로 폭이 좁아져서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려는 ‘큰 정치’는 그 속에 여야 구분이 없습니다. 누가 뽑아주든 안뽑아주든 할 수 있습니다. 단, 자기 돈을 들여서 해야 된다는 것이죠. 이런 정치는 되도록 많은 이들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땅에, 또 전세계에 새코리안들이 수십만 수백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정치에 무관심하지 말고 큰 정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새코리안, 그들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켜 내고 북한 사회도 변화시켜 내고 이를 통해 열방을 변화시켜 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밖으로 드러나선 안되는 피..권력에 대한 욕심 없어졌다”
그러면서 배 교수는 ‘사랑’을 강조했다. 그것은 남북 통일이라는 사명을 감싸고 남는 것이다. 단순한 학자의 논리가 아닌 신학자의 식견마저 느껴졌다. “3년간 시애틀에서 풀타임 사역자로 일을 마칠 무렵에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였고, 그래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거죠. 하나라는 인식 없이 도와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지난 연말 시애틀에서 풀타임 형제 간사들이 리트릿을 가졌는데 각자 자신을 몸의 지체로 표현했는데 저 보고는 피 같다고 했습니다. 피는 아래, 위를 잘 왔다갔다 하면서 소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저의 정체성은 피와 같습니다. 피는 밖으로 드러나면 안됩니다. 안에서 돌아다니는 게 역할입니다. 10~15년 정도 통일 될 때까지 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남이 드러나도록 돕는 역할이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피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멈춘 순간 뇌출혈이 옵니다. 피는 철저히 운반자 역할을 맡습니다.”

너무나 중요하지만 철저히 숨어서 몸의 순환을 돕는 피. 그래서인지 배 교수는 요즘 바쁘다. 잠시 서울에 있는가 싶더니 어느 날은 미국에 가 있고, 지금은 제주도에 머물고 있다. 제주열방대학 북한선교 과정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도 분명해 보인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 점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저는 이제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어졌습니다.” 한국 교회의 뉴코리안들과 함께 그가 일구어낼 뉴코리아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까.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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