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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개월 만에 무죄 석방..'인권운동가' 훈장을 거절하다서쪽나라(9) - 피고. 오영필. 무.죄.


평소처럼 성경을 읽고 있는데 간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는데 앨런이 재판이 열릴 것 같다고 귀띔했다. 시계를 보았다. 8시가 채 되지 않은 걸 보니 그의 말이 맞는 듯 했다. 꿈속에서조차 고대했던 재판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열리다니. 선반 위에 있는 사물함에서 상의를 챙겼다. 간수가 서두를 것을 재촉했다. 급한 마음에 신발을 신지 못한 채 방문을 나섰다. 간수가 누군가의 운동화를 내 발 앞에 툭 던졌다. 출입문에는 이미 김 부장이 와 있었다. 체포된 지 16개월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너무 야위어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가슴이 아렸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자신을 힘들게 한 세월을 토해내듯 그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음식물을 토해냈다.

법정에는 이미 제임슨, 바니 후 변호사가 와 있었다. 그 옆에는 놀랍게도 어머니가 와 계셨다. 어머니는 모든 긍정적 에너지가 몸에서 빠져나간 듯 너무나 작아져 있었다. 수갑을 차고 있는 나를 보시고 속에서 올라오는 통곡을 감추려는 듯 손으로 입을 막으셨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어머니의 흐느낌이 내 자리에까지 들렸다.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정면만 응시했다. 검사의 기소 사실과 변호사의 변론이 이어졌다. 긴장을 풀기 위해 변호사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재판장의 판결문 낭독이 이어졌다.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광저우시 중급 인민법원 형사판결서
공소기관: 광동성 광저우시 인민 검찰원
피고: 오영필, 남, 1970년 2월 16일 생, 한국 국적
본 안건으로 2003년 3월 13일 형사구류되었음
동년 4월 15일 체포되었음
현재 광저우시 제1간수소에 구속되었음
변호사: 제임슨 광동 국정율사 사무소 율사
변호사: 바니후 광동 삼정율사 사무소 율사


조사 확인된 사실 증거에 따라 공소기관이 기소한 피고 오영필은 타인을 조직하여 영사관에 난입 시도로 타국으로 넘어가게 한 사실이 확실하고 증거가 확실 충분하지만 기소한 죄명은 불성립됨. 조사에 따르면 불법적으로 타인을 조직하여 출국시키는 것은 국경 관리 질서를 엄중히 교란하는 행위임. 피고 오영필은 조선 불법입국자들을 타국에 송달하기 위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선 불법입국자들로 하여금 광저우시에 오도록 조직하였으며, 광저우 주재 외국 영사관 외관을 관찰· 촬영하였고, 조선 불법입국자들을 데리고 광저우 주재 외국 대사관과 영사관에 난입하는 행위를 시도하려고 하였음. 그러나 우리나라 국경 내의 중국 주재 외국 대사관, 영사관의 용지는 결코 외국 영토의 연장이 아니며 이는 중국의 영토로서 대사관, 영사관의 외부와 경계선은 국경선이라 볼 수 없음.

대사관, 영사관 건물에 관한 보호는 국경관리에 속하지 않으므로 피고 오영필이 타인을 조직하여 영사관에 난입 시도로 타국으로 넘어가는 행위가 우리나라 국경 관리 질서를 방해하는 행위에 속하지 않음. 그러므로 피고 오영필의 행위는 타인을 조직하여 불법 출국시킨 죄로 구성되지 않음. 공소기관이 기소한 피고 오영필의 타인을 조직하여 불법 출국시킨 죄명이 불성립되므로 본 법원은 공소기관의 기소를 지지하지 않음. 피고인 오영필이 제출한 변론 해석과 변호사가 제출한 피고 오영필이 타인을 조직하여 불법 출국시킨 죄명이 불성립된다는 의견이 정당하므로 본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함. 중화인민공화국 형사소송법 제162조 제2항의 규정을 따르면 판결은 이하 같다.

“피고 오영필 무죄”

재판장 등홍, 대리판사 강금권, 대리판사 채리균
2004년 7월 7일


“오영필 무죄!”라는 법원의 최종 판결이 공표되는 순간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콧등을 타고 땅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마음뿐입니다.’

법원의 판결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영사관은 국경 지대가 아니라 중국 내 영토이므로 범죄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판결문의 요지였다. 솔직히 내가 예상한 최상의 시나리오는 17개월 유죄였다. 그렇다면 왜 내 사건이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그것은 내 사건과 비슷한 판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내 사건을 심리한 광저우 지방법원의 재판관 세 명 중 한 명은 무죄, 한 명은 유죄, 다른 한 명은 유보를 결정했다. 그리고 고등법원으로 사건이 이송되었다. 고등법원에서도 이 같은 결정이 반복되어 결국 베이징에 있는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김 부장의 손을 잡았다. 그에게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지요. 죄송해요.”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이제 앞날 생각만 합시다.”

그는 환한 웃음으로 그에 대한 나의 부채의식을 홀가분하게 털어 주었다. 이제 석방이 임박했다는 직감이 들었다. 형민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기로 했다.

형민아
오늘 아침 갑자기 재판이 열렸고 놀랍게도 무죄판결이 났다. 석방이 된다는 기쁨과 함께 너와의 이별이란 슬픔에 가슴이 아려오는구나. 힘든 시간 서로를 의지하며 잘 버텨 왔는데 너를 두고 먼저 이곳을 나가게 되는 것이 못내 미안하다. 너와 주고받은 편지는 불안한 영혼에 작은 쉼터와도 같았다. 부족한 나를 형으로 대해준 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형민아.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재회의 막막함을 생각하니 분단이란 현실이 새삼 커다란 벽으로 다가오는구나. 비록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에 알게 된 조선 반도의 형제임을 잊지 말자. 우리의 만남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보화처럼 소중하다. 아무쪼록 네 소원대로 고향에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재회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하나님이 너의 인생에 간섭하시고 보호하여 주심을 잊지 않기 바란다. 다시 만날 그때를 기약하며.


형님
형님에게 드디어 석방의 순간이 옴을 내 마음 다하여 축하드려요. 형님이 환하게 웃음 짓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형님과 같은 분에게 이런 좋은 결과는 당연한지도 몰라요. 형님이 제게 많은 것을 주셨지만 무엇보다 불안한 제 마음에 위로와 격려를 주심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형님을 의지하며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꾹꾹 참고 잘 견뎌 왔는데 이제 형님을 다시 볼 수 없다니 저 혼자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요. 그러나 형님, 제가 이곳을 나가면 반드시 형님을 찾겠습니다. 우선 고향에 돌아간 후에 기회를 엿봐 다시 중국에 와서 돈을 벌 것이고, 그때 형님에게 연락할게요. 형님, 이제 고향에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행복하세요. 형민.


저녁 무렵, 철문이 쿵 하고 열렸다.
“오영필, 석방!”
무죄판결만큼 석방은 나에게 황망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불과 긴팔 옷들은 명유에게, 우유와 과일은 앨런의 재량으로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기로 했다. 방을 나서기 전 샤오핑의 손을 잡았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언제나 그를 다시 만나려나. 그도 내 마음을 아는 듯 말없이 꼭 안아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건만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허둥대기만 했다. 현관 앞에는 석방 관련 절차를 처리하기 위해 대여섯 명의 공안이 나와 있었다.

이제 나는 떠난다. 떠난다는 벅찬 설렘과 함께 마음을 지배하는 한 가지 물음, 주님은 왜 날 이곳에 오게 하셨을까? 17개월 동안 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운동하고 다투기도 하며 외로워하기도 또 행복해 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나누었고 때론 한 몸이 되기도 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관계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는 홀로 서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정말 천천히 간다. 그러나 반드시 간다. 천천히 가므로 답답하지만 반드시 가므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석방의 감격으로 며칠간은 행복하겠지만 얼마 후 현실에 적응하며 또 예전처럼 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를 살아도 현재에 함몰되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사는 태도다. 이곳에서 배운 것을 잊지 말고 조금씩 적용하는 것, 그래서 이 땅에 하늘의 통치를 이루는 도구로 쓰이는 것, 이것이 감옥 생활을 통해 얻게 된 소중한 깨달음이다.

감옥 문을 나섰다. 철커덕, 쇠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세상과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교도소 밖에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가만히 어머니를 품에 안았다. 안자마자 어머니는 아이처럼 흐느끼셨다. 복잡한 감정들이 어머니와 나의 몸을 그렇게 어루만졌다. 내가 감옥에 갇히는 순간부터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히신 분, 그곳에서 나와 함께 찬 바닥에 주무시고 나와 함께 고독과 외로움의 여정을 경험하신 분, 내가 감옥에서 나오자 그때 비로소 내면의 감옥에서 나오신 분,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공유하기 위해 이곳까지 와주신 분, 나의 어머니였다.

감옥에서 나오자 저만치 대기하고 있던 검정색 승용차의 문이 열리고, 나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 온 KBS 프로듀서가 다가왔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나의 모습과 신발 밑창에서 감옥에서 쓴 일기를 꺼내는 장면을 꼼꼼하게 화면에 담았다.
승용차는 시내 중심의 한국 식당에 도착했다. 고급스런 한정식이 테이블에 차려졌다. 어머니는 식사를 하지 않은 채 내 밥 위에 반찬을 얹어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임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흥분했다.
“I’m happy. You are my friend.”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죄 석방은 불가능했다. 사건의 의뢰를 맡은 갑과 을의 관계 이상으로 그와 바니후 변호사는 힘든 시간을 나와 함께했던 동지였다. 하나님은 첫 번째 감옥에서는 제이슨을 통해 나를 보호하시고, 이번에는 두 분의 변호사를 보내 나를 외롭지 않게 하셨다.

고영에게 지난 1년 반 동안 감옥 바깥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내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도쿄방송은 출국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는 계약서의 내용과 달리 나에 관한 소식을 듣고도 적극적인 구명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강 목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체포된 직후 가족과 친구들이 구명을 위해 그를 찾았을 때 자신은 단지 소개만 시켜 주었을 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허망한 감정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믿고 그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는 말인가!

중국 감옥에서 나온 이후 강 목사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에서 탈북자와 관련해 이슈메이커가 되어 있었다. 고영은 나의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가 이미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에 갇힐 것을 우려했다. 특별히 재판 당일 <손석희의 시선집중>이라는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라디오 시사프로에서 내 사건이 보도되었다. 그래서 내 사건이 단숨에 사회적인 주목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강 목사는 이러한 고조된 분위기를 이용해 언론플레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유명 연예인처럼 세상의 주목을 받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서특필할 것이다.
“탈북자의 인권을 위해 감옥에 갇힌 비디오 저널리스트 오영필. 17개월 만에 무죄 석방되다.”
그들은 내게 그동안의 설움과 고통을 한순간에 보상받을 수 있는 ‘인권운동가’라는 훈장을 달아주는 동시에 이제껏 유지해 왔던 북한과 관련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것이다. 이렇게 ‘짜고 치는 고스톱’ 속에 일반 시민들은 북한과 탈북자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강 목사의 생각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작은 자에게 향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나를 그토록 오랜 기간 감옥에서 구르게 하신 것이다. 나는 그날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근처 공원에서 어머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언론사로부터 걸려온 전화 세례는 광저우공항에 도착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때마다 인터뷰를 거절하느라 고영은 진땀을 흘렸다. 결국 연합뉴스 기자의 집요한 회유로 짧게 전화 인터뷰를 했다.
“먼저 석방을 축하드립니다.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중국 내 영사관이 국경 지대가 아닌 중국 내 영토로 간주되어 범죄 성립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짧게 소감 한 마디 부탁합니다.”
“그동안 저 때문에 마음고생 했던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석방을 위해 애써 준 구명운동본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늘 위에서 인천공항이 보였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살아 있다는 흥분을 느꼈다. 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나를 애타게 찾는 몇몇의 시선이 느껴졌다. 먼저 대영이와 현철이의 얼굴이 보였다. 잠시 후 경준이, 영민이 등 교회 후배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곧장 교회로 향했다. 그곳엔 나를 위해 1인 시위를 했던 피켓 문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말이 필요 없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구명운동본부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들은 내가 탈북자들의 영사관 진입에 가이드 역할까지 했다는 말에 모두들 당혹해 했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취재만 한 줄 알았는데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음을 알자 심각한 내부 토론이 시작됐다.

다음 날, 대학원에서 북한학을 전공하는 창현이가 둘만의 대화를 요청했다. 여러 차례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만난 경험이 있는 후배였다. 그는 먼저 ‘기획탈북’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설명했다. 기획탈북이란 일부 민간단체들이 탈북자들을 모아 중국에 있는 외국 영사관, 대사관, 학교 등에 진입시키고 이 과정을 생생하게 촬영한 뒤 언론을 통해 국제적으로 이슈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의 폐쇄성, 북한 인권 문제의 심각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것인데 이번에 탈북자들을 데리고 중국 내 영사관 진입을 시도한 나의 행동이 바로 기획탈북 혹은 기획망명이라고 했다. 기획탈북으로는 2001년 장길수 가족이 베이징 주재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에 진입한 사건을 시작으로 2002년 3월 탈북자 25명이 베이징의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일, 2002년 9월 15명이 베이징 독일학교에 진입한 일 등의 사례가 있었다. 스스로의 행동의 정당성을 지키고 싶었던 나는 한동안 그와 입씨름을 했지만 더 이상 그의 주장과 논리에 반박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를 내밀지 못했다.

감옥에서 그 힘든 시절을 견디게 한 버팀목 중의 하나는 도덕적 정당성이었다. 그런데 그의 논리를 수용하면 나의 행동은 위험에 처한 탈북자들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 파렴치범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가치판단은 쓰레기가 되는 것이고, 감옥에서 힘들게 보낸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신중치 못함, 어리석음, 낭패감, 자괴감, 이런 단어들이 유령처럼 머리 위에 붕붕 떠다녔다. 그 충격은 강 목사와 도쿄방송에 대한 배신감보다 몇 배 더 세게 나를 아프게 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으나 결국엔 그분을 배반한 베드로의 심정이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사람을 살리겠다고 들었던 칼로 사람을 죽인 꼴이 돼버리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계속 침묵한다면 ‘하나님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탈북자들이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언론에 의해 포장되는 ‘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버리기로 했다.

그 와중에 KBS 기자에게 인터뷰 요청이 왔다. 그리고 일본 도쿄방송이 탈북자들의 중국 내 영사관 진입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내용이 9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예상대로 그 뉴스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도쿄방송은 즉각 항의 공문을 보내 더 이상 자신들에 대한 내용이 방송되는 것을 막았다. 강 목사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쌓아놓은 사회적인 명예와 신뢰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교회 게시판에 기습적으로 글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그의 요지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오영필은 오직 돈을 목적으로 탈북자를 취재한 것이다.
둘째, 자신은 도쿄방송과 오영필을 중간에서 소개했을 뿐, 이 사건에 전혀 관계가 없다.
셋째, 몇 가지의 이유를 들어 취재를 적극 만류했으나 그가 고집하여 결국 그곳에 갔다.
그의 글에 창현이가 즉각 반박의 글을 올렸다. 이것을 시작으로 강 목사와 나는 언론을 상대로 자신의 입장을 전하는 진실게임을 벌여야만 했다. 강 목사 뒤엔 이미 보수언론이라는 든든한 후원군이 버티고 있었다. 그의 의견을 지지하는 여론도 분명 존재하는 상황에서 탈북 문제에 관한 기존의 사회적 분위기를 바꾼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입국 전에 나에 관한 기사에 적극적이던 보수 언론은 짧게 석방 소식만 전할 뿐이었고, 반대로 북한 인권과 관련해 침묵을 지켜 왔던 진보언론은 기획탈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심층적인 기획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여 북한 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보수적 입장과 우리의 동포이니 통일을 위해서라도 화해와 협력을 해야 한다는 진보적 입장으로 첨예하게 나뉘었다. 그러던 중 한 시사 주간지에서 내 사건을 커버스토리로 다루었고 이를 계기로 내 주장이 조금 더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결국 내 사건은 북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남한 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이념 싸움으로 불거져 갔다.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뒤 기독교 윤리 실천운동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내 사건은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던 탓에 사무실 안은 취재기자들로 붐볐다. 중앙에 내가 앉고 좌우에 구명운동본부 대표인 고영과 기윤실 측 변호사가 앉았다. 테이블 뒤에는 ‘기획망명은 중단되어야 한다.’라는 파란색 플래카드를 내걸고 세상을 향해 부끄러움과 수치를 떨치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 그들은 내게 그동안의 설움과 고통을 한순간에 보상받을 수 있는 ‘인권운동가’라는 훈장을 달아주는 동시에 이제껏 유지해 왔던 북한과 관련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것이다. 이렇게 ‘짜고 치는 고스톱’ 속에 일반 시민들은 북한과 탈북자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강 목사의 생각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작은 자에게 향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나를 그토록 오랜 기간 감옥에서 구르게 하신 것이다. 나는 그날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반갑습니다. 비디오 저널리스트 오영필입니다. 저는 석방이 된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3일 동안 구명운동본부 관계자 분들과 기획탈북에 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알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널리스트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정의에 대한 선한 부담을 갖고 탈북자들의 영사관 진입에 관한 취재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저의 행동이 정의와 공의로 포장된 구조적인 악에 동참하게 된 사실을 알고서 제 자신에 대한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어렵게 양심선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번 취재행위로 인해 선의의 피해를 입은 탈북자들에게 마음 깊이 사죄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자리에서 저의 신중하지 못했던, 한 번 더 돌아보지 못했던 행동에 대해 깊이 반성합니다. 더 이상 기획탈북으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제2, 제3의 오영필이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일반인들은 탈북자를 돕는 행위는 무조건 선한 것이고 그들을 돕는 사람들은 모두 인권 운동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탈북자를 돕는 사람들 중에는 북한을 고립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세력과, 돈을 목적으로 탈북자들을 이용하는 탈북 브로커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드러났다. 이것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 탈북자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그 문제들이란 탈북자들의 한국행과 관련하여 브로커들이 정착금의 일부를 착복한다는 것, 미국의 북한 인권법 통과를 전후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압박의 도구로 탈북자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미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들의 정착에 큰 어려움이 있다는 것 등이었다.

언론을 비롯하여 여러 시민·학술 단체에서 탈북자에 관한 토론회가 활발하게 열렸다. 여러 언론사로부터 기획탈북에 관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결국 그해 9월 나는 국회 정보위원회와 외교통상위원회의 청문회에 참석해 증인과 참고인의 자격으로 탈북자 문제와 관련된 증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의도와 상관없이 유명 인사가 되어 갔다. 탈북자와 관련하여 언론과 토론회로부터 꾸준히 연락이 왔다. 그곳에 참석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정보와 지식을 요구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고민되었다. 계속 갈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집요하게 설득했다. ‘어떻게 얻은 사회적인 명예인데, 평생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몰라. 대부분의 유명 인사들도 이렇게 시작한 거야. 괜찮아, 가도 돼.’ 하지만 계속 가려면 거짓으로 나를 포장해야 했다. 몰라도 아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한다면 평소 그토록 경멸했던 사람들처럼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속으로는 개인적인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속물적인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그 순간 광저우 역에서 체포당할 때 함께 있었던 탈북자의 시선이 떠올랐다. 나를 바라보는 그 간절한 시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번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탈북자와 관련한 사회적 발언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하여 2004년 10월 이후 나는 사람들 앞에서 사라져 익명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거센 후폭풍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내면으로 침잠해 이제껏 쌓아 온 신앙 전반에 관한 혹독한 점검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먼저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했지만 내밀한 곳에서는 약자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그들을 위해 고난 받는 내가 다른 이보다 높은 도덕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 자존감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는 호의를 베풀며 다가오는 사람들조차도 의심하는 버릇이 생기고,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이상한 염려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에 대한 불신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눈덩이처럼 커져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졌다. 내면의 감옥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얼음 인간’이 되어 갔다. 그곳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감옥보다 훨씬 음침했고 몇 배 더 나를 위태롭게 했다.

 

오영필  zeroph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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