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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 패러다임, 북한붕괴 패러다임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현실, 북한의 ‘실질적 핵보유’

북한은 2016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일에 맞춰 제5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번의 제5차 핵실험은 이전의 핵실험과 비교하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2006년 1차 핵실험, 2009년 2차 핵실험, 2013년 3차 핵실험, 2016년 1월 4차 핵실험 등 이전의 핵실험은 주기가 2~3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핵실험의 주기가 8개월로 짧아졌다. 북한의 핵폭탄기술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5차 핵실험을 마친 뒤 북한은 “핵탄두를 표준화, 규격화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했으며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된 보다 타격력이 높은 각종 핵탄두들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1차 핵실험은 플루토늄을 원료로 하여 1Kt의 위력을 보였고, 2차 핵실험은 6Kt의 위력이었다. 3차 핵실험은 고농축 우라늄을 원료로 하여 16Kt의 위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소형화, 경량화’되었다. 4차 핵실험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수소탄 실험이라고 발표했고, 5차 핵실험은 4차보다 2배의 위력을 가진, 역대 최강의 25Kt 정도의 위력을 보였다. 북한은 다섯 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다양한 형태로 실전에 배치할 수 있는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었다.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고도화할 뿐만 아니라, 미사일실험을 통해 이를 운반할 수단의 개발도 거의 완성단계에 진입시켰다. 단거리, 중거리 미사일뿐만 아니라, 대륙간탄토미사일(ICBM)로 사용가능한 장거리 로켓 은하2호가 2009년에, 은하3호가 2012년에, 광명성4호가 2016년 2월에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또한 2016년 8월에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이제 북한은 기존의 핵보유국인 안보리상임이사국 5개국과 인도, 파키스탄처럼 핵탄두를 운반하는 수단의 개발도 거의 완료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북한은 오래 전부터 ‘핵보유국’임을 주장해왔다. 10 여 년 전인 2005년 2월 10일 북한 외무성은 성명을 통해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그리고 두 번째 핵실험 뒤인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김정일이 북한을) 그 어떤 원수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켰다”고 주장하면서, “핵보유국과 위성발사는 대국들의 틈에 끼여 파란 많던 이 땅을 영영 누구도 넘겨다보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등장한 김정은은 2012년 2월에 공포한 새로운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문화했고, 2013년 최고인민회의는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라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러한 과정의 총결산으로서 김정은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에서 ‘경제·핵 병진노선’을 재천명하고, 개정된 노동당규약에는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을 틀어쥔다’고 하여 북한의 최고규범에 핵보유를 명문화했다.

분단 70년이 지난 2016년 오늘날 북한은 작고 가벼우며 다양한 핵무기를 완성했고, 다양한 핵운반수단도 거의 완성했다. 그리고 핵개발과 핵보유국임을 헌법과 법률, 노동당규약과 최고지도자의 언명을 통해 확실히 천명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손으로 해를 가린다고 해를 없앨 수 없듯이 우리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부정한다고 해서 이를 없앨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북한의 핵보유 주장을 무시한다고 해서 북한의 핵보유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위기의 단계,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

1530년대에 코페르니쿠스는 당시에 진리로 받아들여진 ‘지구중심의 우주론’을 대신하여 ‘태양중심의 우주론’을 주창했다. 우리는 이를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기존의 이론으로는 우주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자 관점을 변화시켰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기자 여태까지 아주 복잡하게만 보이던 운동들이 매우 간단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즉 태양 위에 올라서서 본다면, 모든 행성들이 원 궤도를 그리며 이동하는 모습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지구에서 태양으로 관점의 변화! 이것이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본질이다.

토마스 쿤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1962년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글을 발표했다. 쿤에 의하면 과학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

첫째는 ‘정상과학’인데, 하나의 패러다임(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이 확립됨에 따라 공통된 이론적 기반, 방법론이 받아들여지는 시기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이 정해지면 수많은 탐구가 그 패러다임을 토대로 이루어져 축적되고, 많은 장치가 그것의 정밀한 증명을 위해 동원된다.

둘째는 ‘위기’이다.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상 현상이 점점 많이 나타남에 따라 정상과학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는 단계이다. 그러나 ‘정상과학’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상 징후 또는 변칙현상들을 억제하려 한다. 이에 따라 정상과학은 반동적 성향을 띠며 과학은 점점 경직돼 간다.

셋째는 ‘과학혁명’이다. 처음에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경쟁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두 패러다임이 공존·경쟁한다. 그러나 기존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 사이에는 양립 불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과학혁명이다. 이를 통해 기존 정상과학 단계에서 쌓인 성과들은 무너지고, 새로운 정상과학에 입각한 탐구가 이루어지며 이에 필요한 장치가 개발된다.

필자는 일찍이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라는 책에서 역사와 세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중심으로 세계를 볼 수도 있고, 자국 중심으로 역사를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만족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세계와 역사의 진실을 알 수 없게 하고, 이들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만든다. 세계와 역사가 온통 복잡하게만 느껴지고, 자기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불만과 분노만이 일어날 뿐이다.” 여기서 언급한 ‘세계와 역사’를 ‘북한’으로 바꾸면 오늘날 남북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이래 지속적으로 김정은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제5차 핵실험 이후 박대통령은 “권력 유지를 위해 국제사회와 주변국의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정신 상태는 통제불능’”이라고 규정하고, “핵개발에 매달리는 김정은 정권의 ‘광적’인 무모함”과 “북한 정권의 ‘광적’인 집착”을 규탄했다. 박대통령은 김정은의 핵개발을 ‘미친 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과학혁명의 구조>에 의하면 기존의 비핵화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은 매우 전략적인 행동이다. ‘전략’이란 “특정한 장의 명운을 결정하는 것으로서 전체적인 힘의 집중을 수반하며 지속되는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개발은 북한의 국가대전략이다. 북한은 핵미사일이 냉전이후 약화되고 고립된 북한체제의 ‘명운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경제상황이 나빠도 이것에 북한의 ‘전체적인 힘’을 ‘집중’한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어떤 제재가 있더라도 핵개발을 ‘지속’한다. 오늘날 한반도는 북한의 연속적 핵미사일 실험으로 인해 기존의 비핵화 패러다임을 유지할 수 없는 이상상황, 변칙상황이다. 기존의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과 ‘북한의 핵보유 전략’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쿤의 설명대로 하면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위기의 단계’이다.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의 위기와 사드배치, 핵무장론

오늘날 외교·안보·통일 관련 정책담당자, 국제정치학자, 북한전문가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패러다임은 ‘비핵화 패러다임’이다.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은 1991년 12월 31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가서명하고 1992년 2월 19일에 발효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같은 날 발효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한편으로 하고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중지 합의>를 다른 한편으로 하여 짝(set)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동시에 남과 북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해 각종 위원회를 구성하고 후속 회담을 개최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의 국방부 및 한미연합사는 1992년 1월 7일, 북한이 요구해오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중지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남북 사이의 합의인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이후 북한과 미국, 나아가 국제적인 합의로 확대되고 체계화된다. 1994년 10월 21일 미국과 북한은 <미북 기본합의문(제네바 합의)>을 채택해 북한에 대한 경수로 지원과 양국간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 및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했다. 10년 뒤인 2005년에는 남·북을 포함한 미·중·러·일 6개국이 <제4차 6자회담 공동성명(9.19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준수, 북한과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북한에 대한 에너지지원 및 경제협력, 동북아평화안보협력 및 한반도평화체제 추진 등이 규정되었다. 이러한 <9.19 공동성명>이 우여곡절 끝에 2007년의 <2.13 합의>, <10.3 합의>로 구체화되고, 결국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의 <10.4 선언>과 맞물리면서 이른바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은 완성되자마자 붕괴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미국이 2005년 <9.19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날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를 단행함으로써 균열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북한은 제1차 핵실험을 단행해 비핵화에 파열음을 냈다. 다음으로 2008년 2월 남한에서의 정권교체로 <10.4 선언>을 비롯한 이전에 이룩된 남북 간의 합의가 파기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9년 제2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6개국 중 제일 먼저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2008년 2월에 집권한 이명박 대통령도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북한붕괴 패러다임’에 입각해 대북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연이어 등장한 박근혜 대통령도 2015년 9월 한중정상회담 이후 기존의 ‘비핵화를 통한 평화’에서 ‘통일을 통한 비핵화’로 우선순위를 바꾸었다. 이는 미국 국무부 차관 웬디 셔먼이 2015년 1월 “북한 비핵화에 대한 지속가능한 해답은 한국의 통일”이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2016년 1월의 제4차 핵실험 이후 지속적으로 “북한은 핵무기 소형화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화가 아닌 제재와 강압으로 북한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박대통령이 주장하는 북한에 대한 압박과 봉쇄책은 사실상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북한의 ‘체제붕괴’를 위한 것이다. 결국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와 새누리당은 사실상 1991년 이래 추구되어온 ‘남과 북,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관계국들의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 ‘북한붕괴 패러다임’으로 옮겨갔다.

25년간 지속되어온 ‘대화와 합의를 통한 비핵화 패러다임’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남한의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붕괴되자 남는 것은 핵미사일 능력의 강화와 이에 대한 대응 군사력 강화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결정한 사드배치와 새누리당에서 주장하는 ‘핵무장론’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이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비핵화 패러다임’을 벗어났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미국은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등장 이후 북한에 대해 ‘전략적 인내’ 정책을 폄으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정책을 용인했다. 중국 견제를 위한 ‘재균형전략’ 또는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전략’을 위한 명분으로 북한의 위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동아시아에 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목적으로 늦어도 2009년 이후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이 명시적으로 비핵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시점과 미국이 더 이상 비핵화 패러다임을 추구하지 않은 시점은 2009년으로 거의 같은 때이다. 미국에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동아시아에 미사일방어체제를 가동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북한의 핵위협에 취약한 남한으로 하여금 영구적으로 미국의 핵억지 능력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나아가 박근혜 정부의 초기 3년 동안 나타난 한국의 미·중 사이 ‘균형외교’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다. 북핵을 계기로 미국(핵우산)에 더욱 의존적이 된 한국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미·일·한 삼각체제로 더욱 깊숙이 편입되고, 중국과의 관계는 멀어진다.

현재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에 가장 집착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그리고 한국의 야당도 이 ‘비핵화 패러다임’을 기초로 외교·통일·안보 등 한반도 관련 모든 문제를 바라본다. 중국은 6자회담의 의장국으로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합의인 <9.19 공동성명>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를 위해 북한에 대한 제재와 대화재개 노력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2016년 2월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과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론’을 논의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노력은 북한과 미국이 비핵화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2009년 이후 한 번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08년 정권 교체 이후 집권하지 못한 야당도 ‘비핵화 패러다임’의 복원을 위해 다양한 논의를 전개했으나, 북한이 비핵화 패러다임을 폐기하고 한미 양국 정부가 북한붕괴 패러다임에 입각해 정책을 펴는 상황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황혼이 되어야 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새로운 패러다임

‘한반도 비핵화 패러다임’은 실질적으로는 붕괴했다. 그러나 북한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이 ‘대화와 협상을 통한 비핵화 패러다임’에 아직 집착하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기존에 합의된 비핵화 패러다임이 아닌 군사적 대응책 또는 북한붕괴 유도책에 몰두한다.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북한의 비핵화’라는 정책의 ‘효과 대비 비용’에 비해, 북한의 핵개발이 주는 정책의 ‘효과 대비 편익’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그의 책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야 그 날개를 편다”고 말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혜(철학)’를 의미한다. 헤겔은 부엉이가 낮이 지나고 밤에 날개를 펴는 것처럼 지혜(철학)도 역사적 조건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고 보았다. 1991년부터 25년 동안 ‘한반도 비핵화’, 구체적으로 ‘북한 비핵화’가 태양처럼 한반도 위에 떠 있으면서 모든 한반도 문제, 즉 북한, 남북, 북미, 북일 문제를 뒤덮었다. 2007년 10월에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노력에 의해 ‘한반도 비핵화’가 손에 잡히는 듯 했다. 그러나 2008년 이후로 ‘한반도 비핵화’는 점점 빛을 잃기 시작했고, 이제 서쪽 하늘에 걸려 힘이 빠진 채 검붉은 빛을 드리우는 해와 같은 형상이다. ‘한반도(북한) 비핵화 패러다임’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할 때, 다시 말해 황혼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대안(지혜), 부엉이가 날아오를 것이다.

현재 북한의 핵미사일 기술의 발전 속도를 볼 때 늦어도 2018년 이전에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명실상부한 ‘핵보유국’ 수준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한국의 여야 정치세력과 언론, 지식인을 비롯한 국민 모두가,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모두가 ‘비핵화 패러다임’이 붕괴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비핵화 패러다임과 경쟁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지 못하면 비핵화 패러다임의 왜곡되고 퇴행적인 형태가 판을 치게 된다. 그것의 대표적 사례가 오늘날 회자되는 북한 핵시설에 대한 폭격으로 상징되는 전쟁 또는 강압과 비밀작전을 통해 북한의 붕괴를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 비핵화한다는, 이른바 ‘북한붕괴 패러다임’이다. 전쟁과 강압을 통한 북한붕괴 패러다임은 한반도를 1970년대의 냉전시대가 아니라 1950년대의 열전시대로 되돌린다.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자

새로운 패러다임은 현실을 인정하고 문제 해결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국민들과 국제사회에 공인될 수 있다. 우선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실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북한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에 대한 것이다.

먼저 북한에 대한 현실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의 개발을 완료했다는 것,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인’ 핵보유국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결코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고 비핵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핵화는 헛된 망상으로 규정된다. 다음으로 남한에 대한 현실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5천만 국민들에게 각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의 81.2%가 북한의 핵무기가 위협적이라고 대답했는데, 매우 위협적이라고 응답한 비율도 53.5%에 달했다. 북한의 핵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 불안감을 무시하거나 가벼이 여기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국민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기 때문에 자체 핵무장에 대해 65.1%가 찬성하고, 사드배치에 대해 60% 이상 찬성한다.(여론조사 결과는 MBC, 2016.9.14.)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제기되는 우리나라의 핵무장(자체 핵개발, 미국 전술핵 배치)이 세계 핵체제의 특성상 불가능하고, 사드배치는 그 유용성과 대중국 관계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현실적으로 인식되면 될수록 더욱 더 핵무장론과 사드배치론이 힘을 얻게 된다. 반면 이들을 반대하는 것은 국민 대다수의 지지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대안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현실 속에서 ‘비핵화’가 문제 해결의 당면한 목표 또는 문제 해결의 입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의 핵미사일과 관련해서 우리의 당면 목표는 이를 ‘동결’시키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비핵화라는 궁극목표에 매달리지 말고 당면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비핵화라는 궁극목표는 현 정부의 ‘북한붕괴를 통한 비핵화 패러다임’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통일 이후의 문제로 돌려야 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당면한 북한의 핵미사일을 어떻게 동결하고, 나아가 남북관계를 어떻게 개선하여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룰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북핵과 관련된 유일한 대안이다. 북핵·미사일 동결을 위한 정책수단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효될 때 한국과 미국이 실시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지’ 또는 ‘평화협정을 비롯한 관계정상화 논의’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북핵문제 동결을 위한 노력과 함께 ‘국민의 불안’과 ‘중국의 불안’ 또는 ‘미국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도 취해져야 한다. 사드배치가 공포된 상황에서 결정을 번복하기는 쉽지 않다. 가능한 것은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사드배치를 연기하거나, 사드배치를 하되 지역주민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자체의 핵무장이 아니라, 북한의 핵능력이 ‘새발의 피’로 느껴질 정도로 세계최강의 핵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확장억제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핵무장론을 현재의 상황에서 실현 불가능하지만,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한정된 의미를 부여한다면 야당으로서도 검토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지난 25년간 작동한 ‘한반도(북한) 비핵화 패러다임’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강압과 전쟁불사를 통한 북한붕괴 패러다임’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핵미사일 동결 및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평화와 통일’을 핵심으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교하고 온전하게 확립하고, 2018년 신정부의 출범 이후 국민 모두가, 나아가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생존의 기로에 선 코리아’가 다시 평화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항상 위기는 기회이고, 기회는 위기이다.

 

배기찬 /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부문대표, 전 대통령 비서관

배기찬  baekich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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