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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인의 힘

선진국들이 일련의 사회경제적 위기에도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정치의 기본 룰이 상식의 성역으로서 굳건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동하는 물결 저 밑에서 끄떡없이 강줄기를 잡아주는 암반의 역할이 또한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 나라들의 정치가 갈등을 교정하느라 분주할 때, 우리의 정치는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만들어 내느라 부산하다. ‘국가대개조’를 스스로 조롱하는 자학적 인사행태를 보면서, 충성의 대상도, 발언의 기회도, 탈출의 통로도 찾지 못한 채 체념과 좌절을 오가며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한숨이 겹쳐진다.

민주주의 성숙 과정은 비주류 편입의 역사
정치가 견고한 상식의 성채를 쌓아올릴 수 있는 바탕은 사회의 변방들을 포용하면서 그 외연을 점차 넓혀왔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학자에 따라 그 과정을 시민권의 단계적 발전으로 말하기도 하고, 정치의 계급적 지반이 확대되면서 민주주의가 성숙해 왔다는 인식에 닿기도 한다. 요컨대 그 과정은 비주류가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역사였다. 그 갈등과 투쟁의 도정에서 원칙을 공공선으로 구현해 내려는 여성정치인들의 성취는, 현대로 올수록, 각별했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대처나 메르켈도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이념 모두 변방의 인물이었다. 여성이라는 점이 우선 그렇지만, 식료품상의 딸인 대처는 대공들이 좌지우지하던 영국 보수당정치를 16년 동안 지배했고, 메르켈은 35년의 폐쇄된 동독 공산주의에서 성장한 평범한 가정의 딸로서 통일 독일의 수상으로 12년 권좌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 내용이야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대처는 영국 보수주의 전통을 온정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단번에 전환시킴으로써 영국정치의 지형을 바꿨고, 메르켈은 독일 보수주의를 굳건한 실용주의적 토대 위에 안착시켰다. 이들이 말을 먼저 말로써 이겨야 하는 남성중심의 정치를 주도하기까지, 원내외 수많은 정책 논쟁의 혹독한 검증, 길고 지루한 수련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대처의 소신은 벼려졌고, 메르켈의 소통과 타협 그리고 포용의 리더십은 광채를 더해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미국의 여성정치인 엘리자베스 워런이 떠오른다. 아파트수리공인 아버지와 전화교환원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여 하버드 법대 교수, 매사추세츠 민주당 상원의원에까지 이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2012년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상원의원이 된 이후, 그녀는 힐러리 클린턴과 대비되며 미국 언론과 여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아왔다.

아파트수리공의 딸, 미국 대선 후보로 주목받다
그녀는 미국 주류정치에서 위험천만한 선명한 중도좌파 노선을 견지하며, 미국정치와 시장의 게임 룰 자체가 월가와 대기업들에 의해 조정, 왜곡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일관되게 주창해왔다. “부자를 책임지게” 만들기 위해 의회 안팎에서 그녀가 쉼 없이 권력을 다그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 최근 『21세기 자본』으로 일약 스타 진보학자가 된 톰 피케티와 나눈 대담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지만, 그녀는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들과 수많은 통계와 숫자를 동원하여 즉석 토론을 이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때로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도 혼신을 다해 임하는 그녀에게 한 기자가 그 이유를 묻자 대답은 이랬다. “싸우지 않으면 가능성은 제로다. 시간이 없다.” 지난 5월에 출간된 이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줄곧 올라있는 그녀의 회고록 제목이 『투쟁의 기회(A Fighting Chance)』인 것은 흥미롭다.

그녀가 수차례 거부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차기 대권후보를 위한 가상대결에는 늘 그녀의 이름이 들어 있거니와, 최근에는 바이든 현 부통령을 누르고 2위에 올라섰다. 올해로 64세니 2016년의 대선이 그녀에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그래서 지지자들의 성화는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가 얼마 전 물러났다. 또 다른 여성정치인이다. 정재계의 막강한 인맥을 지닌 기업가 집안의 막내딸인 그녀는 부패로 총리직에서 쫓겨나 해외를 떠도는 오빠 탁신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다가 역시 군부에 의해 퇴진했다. (2011년 총선에서 그녀는 “나는 오빠에게 경영과 비전을 배웠다. 나의 사고는 오빠와 같다”는 말로 탁신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엔 공직자 재산등록 시 8천만 원 상당의 시계를 누락시켰다는 것이 화제다. 그녀의 정치행적을 뒤져보아도, 외모와 패션 말고는 정치적 ‘역량’과 관련해서는 이렇다하게 거론할 만한 것이 안 보인다. 과연 한국의 여성정치인(들)은 무엇으로 여론에 회자되는가.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이 글은 유코리아뉴스와 (사)다산연구소의 협의에 따라 게재하는 것으로 글에 대한 저작권은 (사)다산연구소에 있습니다.

고세훈  shko@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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