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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익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 학기의 마무리. 다시금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 세상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꿈 말이다. 하지만 권위적이고 경직된 분위기의 교실과 강의실이라면 이 꿈은 요원해진다. 일방적인 전달만큼 재미없는 수업은 없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터이다.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하는 것. 이 문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열쇠는 ‘질문’이다.

질문과 대답의 과정에는 서로의 수고로움이 뒤따른다. 즉,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는 용기, 그 수준과 상황에 맞게 응대하는 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발랄한 청춘들의 궁금증을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가르치는’ 본분의 하나이다. 질문이 없는 교육현장이란 참으로 슬픈 광경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이 침묵에 너무나 무감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정한 ‘질문’과 ‘응대’는 걸작을 만들어낸다
실학의 선구자였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지었다. 제목 중에 언급된 ‘사설(僿說)’이란, 말 그대로 보잘것없는 자잘한 글들이라는 뜻이다. 성호 스스로 붙인 겸손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결코 그의 말처럼 가벼운 희작이 아니다. 40세를 전후로 하여 성호가 접했던 지식 정보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이 제자들의 질문에 그가 답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질문의 범위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 등에 대해 ‘이해한’ 범위와 그 궤를 함께한다. 지식을 매개로 서로 소통을 하는 사이라면, 특히 스승과 제자의 사이라면 가장 필요한 작업이 질문과 응답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성호 자신과 제자들의 ‘궁금함’이 빚어낸 역작이 바로 『성호사설(星湖僿說)』이다. 결국 이들의 정성스런 토론은 조선 후기 실학을 이끌어가는 초석이 되었다. 이는 개인적 호기심을 넘어서서 지식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생각해보면 질문과 응답이 일구어낸 성과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어』와 『맹자』는 가장 대표적이지 않은가. 또한, 18·19세기 동아시아 각국의 지식인들이 낯선 장소에 모여 적극적으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 없었더라면 지식 정보와 문화는 한 곳에 정체되었을 것이다.

'질문'은 소통의 첫걸음
질문을 이끌어내는 자세는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자 하는 것과 통한다. 요즘을 사는 우리가 애용하는 SNS는 과연 진정한 소통의 공간이라 자부할 수 있을까 올바른 이견(異見) 제시와 의견의 일방적 강요는 차원이 다르다. 진지한 질문과 응대를 거치지 않은 공간에는 ‘화풀이’와 말의 ‘배설’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적막’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다.

13명의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었다. 이제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초중고 교실과 강의실에서 왜 라는 학생들의 질문이 살아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활발한 문제 제기, 치기 어린 토론이 낯설지 않은 교육현장이 눈앞에 펼쳐지기를, 그리고 그 아이들이 사회로 첫발을 디뎠을 때 수많은 부조리와 의혹에 대해 용기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강의 기간 내내 밤 12시가 다 되어도 거침없이 문자로, 메일로 질문해대는 친구들이 예의 없다기보다는 차라리 귀엽고 고맙다. 퇴직하신 연후에도 여전히 제자들의 귀찮은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시는 스승이 존재한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그러니 이 사회 가장 기초가 되는 교육현장에서 “질문”을 살려달라는 요청이 과하다고 생각지는 말았으면 한다.

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이 글은 유코리아뉴스와 (사)다산연구소의 협의에 따라 게재하는 것으로 글에 대한 저작권은 (사)다산연구소에 있습니다.

김영죽  e_das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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