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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일

지난 6월 22일,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새삼 각광을 받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의 축성법의 영향이 남아 있어 동아시아 산성 건축술 교류의 증거일 뿐 아니라 7-19세기 유적이 골고루 발견돼 축성기술 발달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그 등재 이유를 밝혔다.

남한산성의 등재로 한국은 열한 번째의 세계유산을 갖게 되었으며 수원화성과 더불어 두 개의 우리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의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수원화성이 처음부터 왕이 행차할 때 일행이 묵는 행궁으로 지어졌다면 남한산성은 임진왜란(1592~1598),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거치면서 국가 유사시 방어력을 갖춘 산성도시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을 조망할 수 있는, 해발 500m 안팎의 서고동저(西高東低) 산악지형을 따라 만들어진 요새로 애초부터 임시수도로 쓰기 위해 행궁과 종묘사직(좌전과 우실)을 갖추었다. 남한산성은 일반 왕궁과 구분되는 산성이면서도 비상시에는 왕이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전시왕궁이라 할 수 있다. 비상왕궁으로 사용된 산성은 세계적으로 남한산성이 유일하다고 한다.

남한산성에 대한 유네스코의 평가와 세계유산 등재는 분명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 기쁜 소식은 동시에 1636년 병자호란 때 이 민족이 겪었던 수난과 고통, 치욕과 수모를 어쩔 수 없이 떠오르게 한다. 그 해 섣달 열 나흗날, 조선 조정은 두 왕자와 비빈종실, 그리고 남녀귀족을 우선 먼저 강화로 피난케 하고 임금은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이미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길을 돌려 찾아 들어간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다행히 남한산성은 10년 전에(1626) 비상 왕궁으로 새롭게 축조되었고, 성 안에는 1만 3천의 군사와 50일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여기서 그 추운 겨울에 47일을 버티다가 이듬해 정월 그믐날, 성에 가득한 백성들의 호곡 속에 인조는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올리며 항복하였으니 그 치욕이 삼전도비로 지금도 남아있다. 두 왕자가 볼모로 끌려갔고,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였다. 50여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니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되었고, 돌아온 여인들은 화냥년(還鄕女)이라 불리었다.

찢는 김상헌과 붙이는 최명길

이 나라 역사에서 내가 가장 처절했던 장면의 하나로 꼽는 일이 이 남한산성에서 있었으니 항복문서를 놓고 울면서 한 사람은 찢고 다른 한 사람은 다시 주워 붙이는 장면이 그것이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大淸國) 관온인성(寬溫仁聖) 황제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소방(小邦)은 대국에 거역하여 스스로 병화(兵禍)를 재촉하였고 고성(孤城)에 몸을 두게 되어 위난은 조석에 닥쳤습니다. … 지금 원하는 바는 대국의 명을 받들어 그 번국이 되고자 합니다. …”

여러 차례 퇴고를 거듭한 국서를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이 다시 고치고 있는 것을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이 들어와서 보고는 그것을 빼앗아 찢어버리면서 “대감은 항복하는 글만 쓰오 선대부(先大夫)는 선비들 사이에 명망있는 분이었소. 먼저 나를 죽이고 다시 깊이 생각해주오” 하며 통곡하니 세자 역시 임금 옆에서 목놓아 울었다.

최명길은 찢은 종이를 다시 붙이며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고(裂書者도 不可無요), 다시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오(補習者도 不可無라). 찢는 것은 대감으로 마땅히 하실 만한 일이나 종사를 위해서는 다시 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는 최명길 역시 울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성구가 김상헌에게 “대감이 척화하여 국사가 이렇게 되었으니, 대감의 이름은 후세에 남겠지만, 종사는 어떻게 할 것이오” 하며 달려들자, 김상헌이 “나를 묶어서 적진에 보내주오” 통곡하며 밖으로 나가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익성이 “이 칼로 주화자를 목 베리라” 하였다. 그러나 왕은 최명길에게 국서를 다시 초하게 하여 좌의정 홍서봉을 청나라 병영에 보내 화의를 청했다.

   
 

아마도 이날이 정월 열여드레였을 것이다. 나는 이 나라 역사에서 그때의 이 처연한 장면을 잊지 못한다. 나는 김상헌의 대의와 최명길의 경륜을 다 같이 높이 평가한다. 김상헌은 항복하는 글을 찢음으로써 대의를 세웠고, 최명길은 그것을 주워 모아 화의를 주선함으로써 종사를 구하였다. 위난의 남한산성에는 대의가 살아 있었고 경륜이 또한 숨쉬고 있었다. 지금 이 나라에 과연 대의가 있는가. 경륜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무능과 부패, 그리고 아첨만이 판을 치고 있을 뿐이니, 슬프다.

김정남/ 언론인, 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이 글은 유코리아뉴스와 (사)다산연구소의 협의에 따라 게재하는 것으로 글에 대한 저작권은 (사)다산연구소에 있습니다.

김정남  e_das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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