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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장은 권엄(權欕) 같은 사람으로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목민심서』를 읽다 보면 정말로 정약용은 대단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권엄은 정조 때의 고관대작으로 병조판서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오늘의 서울특별시장격인 한성판윤까지 역임한 사람입니다. 1729년생이니 다산보다 33세나 많은 대선배였습니다. 그는 1801년 신유옥사 때 같은 시파이면서도 천주교 신자들을 극히 미워하며, 이가환․이승훈․정약용까지를 모두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당파로서 천주교 문제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아들 같은 다산을 매우 가깝게 여기고 많은 칭찬을 하면서 다정하게 지내던 처지였음도 사실입니다.

천주교도들에게 강경한 입장이던 권엄이었지만, 다산은 귀양지에서 저술한 『목민심서』에서는 그런 사감은 모두 잊고, 권엄이 한성판윤 시절에 훌륭한 인간 사랑의 정책을 폈던 점을 매우 높게 여기고 칭찬을 바치는 글을 썼습니다.

   
▲ 한성판윤 권엄 영정

“왕실의 어의(御醫) 강명길(康命吉)이 왕의 은총을 믿고 마음대로 설치니 민간에서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명길은 서대문 밖 교외에 땅을 사들여 그 어버이를 이장하였는데, 그 산 아래에는 오래된 민가 수십 호가 있었다. 그는 이를 모두 사들여 10월 추수 후에 집을 모두 비우기로 약속받았는데, 그해 가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약속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에 명길은 그의 종들을 시켜 한성부에 고소했다. 그러자 권엄은 몰아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임금이 승지 이익운(李益運)에게 말했다. 강명길이 다시 고소할 테니 권엄에게 말하여 아전들을 풀어서 백성들을 몰아내도록 하라고 일렀다. 강명길이 다시 고소했으나 권엄은 예전의 판결을 바꾸지 않고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이에 임금이 이익운을 불러 우레같은 노여움을 토로하자 듣는 사람 모두가 목을 움츠렸다. 이익운이 권엄에게 임금의 뜻을 전하자, 권엄은 ‘백성들이 지금 굶주림과 추위가 뼈에 사무치게 되었는데 몰아내서 쫓는다면 길바닥에서 다 죽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차마 이렇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를 원망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 다음 날에도 강명길이 다시 고소하였으나 종전의 판결을 따를 뿐 조금도 고치지 않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권엄을 위태롭게 여겼다. 여러 날 뒤에 임금이 이익운에게 ‘내가 조용히 생각해보니 판윤의 처사가 참으로 옳았다. 판윤 같은 사람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그대는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이를 들은 권엄은 감읍하였다.” (刑典․聽訟下)

그 신하에 그 임금이다(是臣是君). 권엄 같은 서울 시장을 우리는 원합니다. 정조대왕 같은 통치자도 그리워합니다. 민생과 민권을 그렇게 높게 여겼던 권엄, 그런 신하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통치자, 오늘의 우리는 언제 그런 시장과 그런 통치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재개발 지역의 참사들, 예컨대 용산참사에서만 보아도 우리는 권엄 시장이나 정조 같은 지도자들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이 글은 유코리아뉴스와 다산연구소의 협의에 따라 게재하는 것으로써 저작권은 다산연구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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