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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왜 ‘고도’를 기다릴까

어두운 밤, 별빛이 하늘과 강물에 번져나가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풍경화가 떠오른다. 고흐의 아픈 삶이 풀어낸 화폭은 고통의 에너지가 예술로 생성되는 비의를 증명해낸다. 자신의 이름을 ‘매우 쓰디쓴’이란 뜻의 러시아어 ‘막심 고리키’로 짓고, 아픈 삶을 소설로 써낸 작가도 있다. “토악질하듯이 괴롭게 몸부림을 치며” 소설을 쓰는 것이라는 절절한 박완서의 고백도 있다 (<부처님 근처>에서).

권력자와 어른들의 비열함과 무책임 들켜

아픔이 지어낸 작품들이 저릿저릿 다가오는 나날을 많은 이들이 살아내고 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살아내는 것 또한 쓰니, 그 힘으로 글을 쓰자, 란 각오로 자판을 두드린다. 마침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 ‘조율’은 아픔의 속내를 뒤집어낸다. “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 무엇이 문제인가/ 가는 곳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지고지순했던 우리네 마음이/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해 왔었는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이런 곡을 지어낸 한돌의 아픔의 에너지가 와 닿는다. 처절하게 깔리며 절규하듯 외치는 한영애의 리듬은 이 세월에 공명한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아픔 뒤에 깔린 권력자와 어른들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진면목이 아이들 앞에 들켜버렸다.

“기다리라”는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아이로 성장한 아이들은 못다 핀 꽃으로 지니 어안이 벙벙하고 힘들다. 나이를 벗어난 평등사상도 없고, 돈보다 생명을 위하는 박애심도 없는 기이한 위계질서와 기회주의에 급급한 어른 무리에 묻혀 또 하나의 어른으로 살아내는 것도 숨이 막혀온다. 어디에서건 아이들을 만나면 미안하다. 그저 같은 시공간에서 책임감을 갖고 아이들과 같이 살아내는 것이 일상의 책무라는 생각도 든다.

   
▲ 서울시청앞 광장 분향소 옆 나무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수없이 나붙어 있다. ⓒ유코리아뉴스 최승대 기자

<고도를 기다리며>는 산울림 소극장에서 40년 이상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불현듯 왜 한국판 <고도를 기다리며>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무대인지 퍼뜩 다가온다. 이 작품을 쓴 사무엘 베케트는 옆모습이 매처럼 예리해 보이는 아일랜드 출신이다. 아일랜드는 <커미트먼트>(알란 파커)라는 영화에서 그려내듯이 약소국 특유의 역사적 아픔을 가진 나라이기에, ‘유럽의 흑인’으로 불릴 정도이다. 베케트는 아일랜드를 떠나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프랑스에 머문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지극히 단조롭고 지루해 보이지만, 우매한 다중의 막막한 현실감이 절절하게 전해준다. 실존철학의 대가 사르트르는 이 작품이야말로 “최초의 완벽한 희비극”이라고 격찬했다. 프랑스의 보수 일간지 ‘르 피가로’에서도 이 무대를 보고 “광대들이 공연하는 파스칼의 명상록”이라는 유려한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잊은 채 반복될까 두렵다

문학사에 기록된 걸작이기에 읽어봐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는 오래전 이 작품을 읽었다. 왜 이 남자들은 고도를 기다릴까 답답해 보였다. 그러다가 4년 전이던가 서울 한구석 산울림에 가서 임영웅 연출로 전개되는 연극을 보며 그 답답함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배치된 황량한 무대를 마주했다. 단조로운 반복을 구경하며 우리의 사회사와 역사적 질곡이 나의 삶과 오버랩되는 아찔했던 감흥이 아픈 4월을 보내며 강력하게 되살아난다. 반복적인 일상적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이 기다리는 고도 (Godot)는 신을 뜻하는 영어의 갓(God)과 프랑스어의 디유(Dieu)의 합성어란 해석도 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희망과 꿈을 가진 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가져다 줄 초월적 존재, 막강한 권력이 바로 그 기다리는 고도일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 그런데도 고도가 올 것이라는 기대는 왜 지속되고 반복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라는 블라디미르의 대사가 잔인한 사월, 먹먹해진 귀를 찢으며 공명해 온다. 귀를 막는 습관, 관료주의에 대한 낙심과 무심함, 악의 평범성을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는 각오도 솟아오른다. 아이들이 보고 있고, 울고 있고, 떠나는 세상을 “이번엔 잊지 말자”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가면 과거 그랬듯이 다시 잊은 채 반복될까 두렵다. 모든 반복에는 차이가 있어야 구조된다. 이번엔 차이를 만들어내야 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데 쓰던 에너지가 스스로 고도가 되는 변화와 연대의 힘으로 분출할 것을 기원한다.

유지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이 글은 (사)다산연구소와 유코리아뉴스의 협의에 따라 게재하는 것으로써 저작권은 (사)다산연구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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