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사람이 살다보면 어느 순간 결단을 내려야할 때가 있다. 특히 지도자일수록 그렇다. “마누리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고 부르짖던 삼성 이건희 회장처럼 조직 전체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지도자는 한동안 외로워진다.

한국축구 대표팀 홍명보 감독은 8월27일 제3기 국가대표 선수명단을 발표하면서 유럽파인 기성용(영국 스완지시티)과 박주영(영국 아스널)를 제외시켰다. 결단을 내린 홍명보 감독의 대표선발 기준은 엄격했다. “자신의 소속팀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는 대표팀에서도 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기성용과 박주영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홍명보 감독을 도와 한국 올림픽 역사상 첫 축구 동메달을 따낸 주역들이다. 기성용은 영국과의 4강 진출전에서 마지막 승부차기 선수로 나와 골을 성공시킴으로써 승리의 주역이 됐다.

박주영은 일본과의 동메달(3위) 결정전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어 동메달을 따게 한 장본인이다. 그 결승골이 대한축구협회가 축구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올해의 골’로 선정됐다. 대신 기성용은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은 2012년 한국축구를 부흥시킨 ‘올해의 골’과 ‘올해의 선수’ 두 명 모두를 국가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았다. 감히 아무나 할 수 없는 눈물의 결단이었다. 하지만 더 큰 목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릴 수밖에 없었던 판단이었다.

홍명보 감독은 한국축구의 부활을 위해 6월 하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 이면에는 6월18일 서울에서 열린 이란과의 월드컵 아시아예선 A조 최종전에서 한국이 이란에 0대1로 패배한데 따른 악화된 여론이 최강희 감독의 경질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경쟁국인 B조의 일본이 5승2무1패 승점 17점이라는 아시아 최고점수로 깨끗하게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과 너무나 비교가 됐다. 그때 나는 2002월드컵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을 생각했다. 그가 바로 홍명보 감독의 스승이다.

히딩크가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한국에 처음 온 것은 2000년 12월17일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고작 1년6개월 남겨둔 시점이다. 솔직히 그때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또한 제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18개월 만에 한국팀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나 축구팬들도 그랬다. 다만 히딩크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면, 2002년 월드컵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열리는 ‘안방 대회’인 만큼 한국축구의 염원이자 주최국의 체면세우기인 ‘월드컵 본선 1승’을 제발 달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그 이상의 목표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는 인천공항의 입국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월드컵에서 꼭 1승을 거두도록 하겠다. 16강 진출을 반드시 이루겠다. 나는 배가 고픈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2002월드컵을 앞두고 축구를 거의 신앙이자 국기(國技)처럼 여기던 국민들은 ‘설마’ 했다. 히딩크의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축구 후진국 한국이 16강에 진출한다니, 히딩크가 ‘뻥’을 쳐도 너무 큰 ‘뻥’을 쳤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보란 듯이 해냈다. 꿈의 ‘1승’을 달성한 것은 물론 불가능한 목표로 제시한 ‘16강’도 달성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팀은 16강을 넘어 8강으로, 8강을 넘어 4강으로 도약했다.

히딩크는 무엇이 한국팀의 문제인지 간파하고 있었다. 그가 대표팀 훈련장에 들고 나온 것은 기존의 격식 파괴였다. 그에겐 ‘리더 선수’도 없었고, ‘업라인 선수’도 없었다. 그는 “지금부터 당신들은 모두 똑같은 선수”라고 선언했다.

그때 대표팀 ‘다운라인’ 박지성은 20살에 불과한 명지대 소속 대학생이었다. 맏형 ‘리더선수’ 황선홍은 은퇴할 나이인 33살이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히딩크의 지시에 따라 언어부터 개혁했다. “지성아 이쪽으로…”, “선홍아 이쪽도 봐야지…”, 그들은 서로 그렇게 불렀다. 경기장에서 만큼은 ‘야자타임’인 것이다. 처음엔 모두 어색해 했지만 갈수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히딩크의 ‘자율축구’가 한국을 ‘기적의 팀’으로 올려놓은 힘이 됐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계급을 의식해 ‘업라인’의 눈치를 보면 ‘다운라인’은 성장할 수 없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호칭을 파괴하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대기업 SK텔레콤 역시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에서 ‘홍길동부장님’과 같은 호칭대신 ‘홍길동님’과 같이 직급을 파괴해 서로 ‘님’자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홍명보 감독은 이번 대표팀 선수구성을 하면서 “기성용과 박주영은 한국 축구에 중요한 선수들이다.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지금 부진하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우리보다 그 선수들이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팀 경기에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본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고 한국 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본인들이 불안하고 답답하겠지만 좀 더 여유를 갖고,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속팀에서 성실히 경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홍명보 감독의 말 속에는 이번에 대표팀 선발에서 ‘눈물로 제외시킨 1등 공신 선수’들에 대한 배려와 믿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지금의 시련을 이겨내고 제자리를 찾으면 언제든지 대표팀으로 다시 부르겠다는 뜻”이다.

나는 9월14일을 우리 기업의 ‘제2창업의 날’로 선언할 작정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 즉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으나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사업장 분위기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천년기업으로 갈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이를 결단하면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몇몇 분을 대표선수 선발에서 제외시켰다. 그 기간을 내년 4월까지로 정했다. 그들이 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앞으로도 충분히 회사발전과 함께 할 인재들임을 나는 잘 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취임하고 나서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고 실토했다. 당시 세계 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어두움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92년 여름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그대로 가다가는 경쟁사들에 밀려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는 해외에서 사장단 회의를 잇달아 가진 끝에 변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삼성의 ‘신경영선언’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던 것이다.

이제 충청도 수안보의 고운리 계곡에도 가을이 시작된다. 가을의 수확은 봄에 무엇을 심고, 여름에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도자는 최후의 5천 결사대를 조직한 계백장군의 심정으로, 고작 12척의 배를 끌고 나선 이순신장군의 심정으로, 승리를 위해 마누라와 자식까지 전투에 참여시키는 결연한 심정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욕심을 위한 씨뿌리기가 아닌 전체를 위한 결단이었다면, 모두를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진정성은 가을이 오면 충분히 증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노규수_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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