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 노규수(해피런㈜ 대표이사)
성공이란 성공할 때까지 끊임없이 매진하는 일이다. 바로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84~1989)가 한 말이다. 확신을 갖고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는 일본의 세계적 기업 ‘내쇼날’의 창업자다.

그가 타계한 후 ‘내쇼날’은 2008년 ‘파나소닉’으로 이름을 변경했는데, ‘내쇼날’이나 ‘파나소닉’ 모두 마쓰시타전기의 브랜드 명이었다. 브랜드 명이 고객에게 친숙한 이름이 되다보니 회사이름으로 바꾼 케이스다.

뒤집어 말하면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고객들이 선택한 회사 이름인 셈이다. 그는 잠재 고객의 편의까지도 고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고객의 편에서 고객에게 접근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0년 일본 오사카에서 세계 엑스포가 열렸을 때다. 당시 그 엑스포는 엄청난 인기를 얻어 행사기간동안 무려 760만 명이라는 관람객이 몰렸다.

날씨는 지금과 같이 무더운 여름. 마쓰시타는 전시관을 보러 온 관람객들이 더위에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주저 없이 고객들이 오면 나누어주려고 제작한 회사 광고지를 접어서 종이모자를 만들어서 제공했다.

그의 친절은 오히려 회사 광고에 더 유용하게 작용했다. 고객을 위한 아이디어가 당장 대 히트작이 된 것은 관람객들이 쓴 그 모자 때문이었다. 관람객들이 종이모자를 쓰고 가는 곳마다 마쓰시타전기산업이라는 회사 이름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엑스포장에 넘실댔다.

그 같이 ‘즉흥적인’ 고객서비스 아이디어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고객들이 자신의 회사 전시장에 들어오려고 길게 줄서있는 그 현장에 고객들과 함께 줄서 있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재벌의 총수가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서있는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이나 다름없는 광경일 것이다.

더구나 당시 그는 75세의 ‘노인’이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관람객들에게 들고 있던 광고지를 접은 모자를 나누어주고 자신도 썼다. 뜨거운 태양을 가리는 좋은 수단이었다.

깜짝 놀란 직원들이 뛰어나왔다. 그는 만류하는 직원들에게 “사람들이 입장하려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직접 체험해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총수의 뜻에 따라 ‘아까운 광고지’를 접어 길게 줄 서 있는 고객들에게 종이모자로 모두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그 일화는 많은 기업들에게 고객을 이해하려면 고객이 있는 최전방에 가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던져 주었다. 제품을 놓고 고객과 만나고, 고객과 똑 같이 제품을 체험해 보라는 고객중심 경영이었다. 그것이 바로 ‘마쓰시타 고노스케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인들은 자신의 자리가 높이 올라갈수록 그 만큼 고객과 멀어지고 만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고객의 중요성을 잘 알아야 한다고 부하 직원들에게 강조하면서도 회사정책은 오히려 고객에 반(反)하는 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바로 ‘고객과 함께 하는 체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8년 IMF회환위기를 겪어야 했다. 한 기업이 부도가 나도 임직원들과 그 가족, 협력업체들에 미치는 영향이 큰데 당시 쓰나미처럼 밀려온 IMF사태는 온 나라가 부도가 날 수 있는 엄청난 재앙이었다.

당시 모든 국민들은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어린아이 돌 반지까지 들고 나와야 했다. 시집올 때 집안의 가보라고 전해준 친정엄마의 금가락지도 들고 나와야 했다. 돌아가실 때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으로 남긴 금목걸이도 들고 나와야 했다.

이 광경을 본 때문일까. 김경일 교수(상명대. 한문학)는 1999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수염이나 쓰다듬고 있는 국가나 기업, 사회의 지도층들에게 당장 국민들의 체험 현장으로 달려가 그들과 함께 하라는 일갈이었다.

나는 그 말에 큰 박수를 쳤다. 함께 살면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이라는 한국의 전통사상을 잠식해버린 권위주의적 유교문화에 대해 직격탄을 날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김경일은 공자의 도덕은 백성을 위한 인본주의 도덕이 아닌, 군주정치의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라고 비판했다.

고려 때까지 이어온 홍익인간 정신이 조선조 500년간 사라져야 했던 것이 바로 공자의 논리였고, 절대적 권위에 복종케 하는 수직윤리였다. 당시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한 소수의 양반들이 95%의 백성을 하층민으로 거느리며 강요했던 충(忠)과 효(孝)의 유교사상은 그들에게 만사 편안한 지배이데올로기로 활용할 수 있었다.

공자의 본래 뜻이 어떠하든, 결국 공자의 도덕을 받아들인 한국의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 우월 의식과 여성 착취,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양반중심 서열문화와 권위주의적 헛기침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것들은 사람이 살아 숨 쉬는 삶의 공간에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창의력, 생명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치라는 것이 김경일의 주장이었다.

그는 공자의 유교가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뒤처지게 했다고 지적했다. 소수 엘리트주의와 기득권층의 보수대결집의 배후에는 유교의 사농공상(士農工商)적 신분질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외국계 다단계 기업의 함정에 빠져 큰 피해를 입었던 나는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한 IMF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 관료들이 가장 먼저 공자에서 벗어나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실제 성공할 때까지 끊임없이 매진했던 사람이다. 그는 집안이 망해 9살 때부터 남의 집에서 심부름하면서 밥을 얻어먹어야 할 만큼 가난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보고 싶어 밤마다 울어야 했던 울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공부는 할 수 없어 초등학교 4학년이 가방끈의 전부였다. 한참 자랄 나이에 먹지 못한 때문인지 늘 허약했다.

그가 570개의 기업과 물류센터, 13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가 되자 성공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3가지를 꼽곤 했다. 바로 ‘가난’과 ‘못 배운 것’, ‘허약한 몸’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조건을 준 하늘에 감사한다고 했다.

가난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못 배웠기 때문에 항상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받들어 배워야 했다고 했다. 몸이 약했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아 늘 몸을 관리했다고 했다.

그를 경영의 신으로 만든 것은 천재가 아닌 그 같은 노력 때문이다. 머리에 든 ‘먹물’이 의식을 지배한 것이 아닌, 이마에 흐른 ‘땀방울’이 가치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인인 그를 존경한다. 그는 유교의 삼강오륜이라는 지배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했다.

기업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그는 “사랑받기 위해 존재한다”고 답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는 모기업 마쓰시다전기의 회사 창업일을 1932년5월5일이라고 수정했다. 그날이 ‘이 세상의 가난을 몰아내는 일’을 경영자로서 깨달은 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제 ‘노규수 스타일’을 만들 참이다. 공자가 아닌 홍익인간을 우리 회사의 참 스승으로 모시고.

노규수_ 1963년 서울 출생. 법학박사. 2001년 (사)불법다단계추방운동본부 설립 사무총장. 2002년 시민단체 서민고통신문고 대표. 2012년 소셜네트워킹 BM발명특허. 201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2012년 홍익인간. 해피런㈜ 대표이사. 2013년 포춘코리아 선정 ‘2013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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