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는 미성숙한 자가 아닌, 사유함으로써 저항과 복종을 분별하는 성숙한 당신(U)이 최고(VIP)다.

역사적으로 이성의 시작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사유주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부터 비롯된 근대 철학이다. 이처럼 이성은, 출발점이 된 이후 곧 모든 서양철학의 중심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은 계몽주의를 산출하고 급기야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키는 근원이 되었으나 20세기의 양차대전을 몰고오면서 더 이상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맞이했다. 

즉 계몽과 낭만의 이성에 대한 무한 신뢰는 '흔들린 우정'처럼 배신과 함께 '중심이동'을 한 것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료에 대한 무한 신뢰가 코로나19에 의해 '금이 간 환상'이 된 것도 같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이 땅에서 최고善에 의한 인간 해방을 외치는 보편 이성이 질적 변화(가치중심)로부터 양적 변화(물질중심)로 나아가는 인류사의 도도한 흐름(계몽변증법 혹은 모순적 '중심이동')을 감당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한편, 그 과정에서 보편 이성마저도 권력(정치, 푸코의 중심분석)이나 자본(경제, 마르크스의 중심분석)에 의하여 이용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남겨주었다. 

그렇다면 이성만능주의 시대에 누가 이성의 배후에 있는 非이성의 존재를 미리 예견했을까. 서양철학에서 니체만이 코기토 중심의 근대 철학을 해체하면서 '중심이동'을 예언자처럼 짚어냈다. 과연 니체는 망치를 들고 나타난 독특한 철학자였던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니체의 계보학적 '중심이동' 방법론을 전수받은 자가 푸코(M. Foucault, 1926 - 1984)다. 그리하여 이성이 아닌 비이성, 즉 광기를 중심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부터 시작하여 이성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역사의 무의식의 힘(권력)을 파헤친 것이 <광기의 역사(1961)>와 <감시와 처벌(1975)>이다.

 

▲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년). 프랑스의 정신병학 학자.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의 저자. 1968년 파리를 휩쓴 학생혁명 이후 계속된 사회 변혁운동에 교수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적극 참여했으며 여러 대학의 철학 교수를 거쳐 1970년부터 프랑스 최고 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상체계의 역사' 담당 교수로 활동했다.
▲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년). 프랑스의 정신병학 학자.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의 저자. 1968년 파리를 휩쓴 학생혁명 이후 계속된 사회 변혁운동에 교수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적극 참여했으며 여러 대학의 철학 교수를 거쳐 1970년부터 프랑스 최고 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상체계의 역사' 담당 교수로 활동했다.

 

◇ 권력은 영원하다 

필자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캔의 <봄날은 간다>가 있다. 뒷골목의 어두운 세계를 조명하면서 수컷의 냄새, 힘이 지배하는 욕망의 세계를 노래한다. 무의식은 의식의 보이지 않는 뒷골목이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내면에서 무의식을 발견했다면, 푸코는 인간의 역사에서 무의식을 발견한 것이다. 

한마디로 푸코 사유체계의 키워드는 권력이다. 그는 '권력 없는 주체는 없다'고 보았다. 

즉 선험적 주체를 거부하고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구성되는 주체를 파악하고자 했다. 마치 고고학처럼 시대마다 지식의 지층이 다르게 형성되어 있기에 시대정신이 반영된 고유의, 무의식적 인식틀인 에피스테메와 그에 따른 사회영역별 언어로 직조된 이야기(이론과 실제), 즉 담론(정치, 경제, 교육, 의료 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고로 진리는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결정한다. 

즉 시대마다 진리가 다르다. 예컨대 과거에 광인은 정상인과 구분이 없었다. 외려 르네상스 시기의 광기란 귀신 들린 사람의 이미지에서 느껴지듯, 신비롭고 신성한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다가 이성이 배후에서 관리함으로써 광기가 추방되었다. 이는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에 인도주의를 표방한 정신병원의 설립으로 광인이 사회로부터 격리, 배제되는 것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성과 광기의 분리는 여러 역사의 과정에서 나타났고 마침내 권력은, 이성에 근거하여, 교묘하고 은밀하게 작동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사회제도의 명목으로 판옵티콘처럼 유폐적 그물망을 형성, 감시와 처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판옵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이 합성된 용어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의 형태이다. 

교도소에서 중심에 위치한 감시자들은 외곽에 위치한 피감시자들을 감시할 수 있으나, 감시자들이 위치한 중심은 어둡게 되어 있어 피감시자들은 감시자들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게 설계되어 있다. 이처럼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 죄수들이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역사의 진행도 무의식의 힘에 의하여 방향 지워지므로 자연의 인과율도 적용되지 않고 연속성도 없으며 불연속적인 분절로 본다. 시대마다 역사의 지층이 다르게 형성되어 있고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무의식의 힘을 밝혀내야 했기에 그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요컨대 푸코는 계보학과 고고학의 이중 방법론으로 지식과 권력이 융ㆍ복합되어 '지식권력'으로써 작동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일류 철학자의 반열에 올라 있다. 

◇ 현대: 지식권력과 자본권력 

푸코는 현실에서도 일류였다. 1955년, 스웨덴 웁살라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 원장 자리를 얻은 그의 객지 생활은, 매우 열성적인 원어민 강사이자 유능한 관료로서, 멋진 재규어 자동차를 몰고 다녔고 술자리에도 곧잘 어울렸다고 한다. 

푸코를 통하여 우리는 역사의 표면(의식)에서 심층(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정신의 '중심이동'을 배웠다. 그 결과, 비로소 어두운 비진리가 가면을 쓰고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인정받는, 기막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지식권력이 전면적으로 작동하면서 유폐적 그물망으로 여전히 우리 자신을 감시하고 있기에 사회가 감옥으로 보인다. 특히 자본이 권력이기에 오늘날은 모든 가치평가가 소위 '자본권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 또한 불편한 진실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고로 권위와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는 미성숙한 자가 아니라 사유함으로써 저항과 복종을 분별하는 성숙한 당신이 최고다(유빕). 불건강한 유폐사회에서 건강한 유빕사회로 나아가고자,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되새기며 이를 조금 수정하여 함께 일류('중심이동')에 도전하자고 외치고 싶다:

'나는 자유다. 나는 학생이다. 그리고 나는 일류다.'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 필자 한병현 : 서울대 약학대학 및 동 대학원 졸.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약학 박사. 前한국보건산업진흥원 사업단장. 前아시아약학연맹(FAPA) 사회약학분과위원장. 前사회약학연구회 회장. 前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위원. 국제학술지 ‘AIMS Medical Science’ 前객원편집장. 現유빕공동체 대표. 現압구정 예주약국 대표. 現BOC(방앤옥컨설팅)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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